수필및 기행문

46. 중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공관 방문

泉玟 김동석 2015. 9. 26. 21:50
중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공관 방문
 
 
​2015년 9월 5일 중경 임시정부 공관 방문
정충국친구와 중경 여행시 마지막날 비가 내리는날이다
만성 석림 여행후 점심을 한국식당을 찾아서 시내중심부에 있는 곰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관을 방문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옷이 젓기는 했어도 맞을만하게 내려 다행히 공관전체를 돌아보았다 이국만리까지와서 일본놈들의 픽박으로 여러번 이동을 하여 중경까지 와서 정부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1945년 광복 때까지 항일운동의 대표기구 역할을 수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 마지막 청사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 조직된 뒤 상하이에 청사를 두고 활동해 왔으나,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1940년에 충칭으로 청사를 옮겼다.

임시정부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27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환국한 뒤, 임시정부청사는 충칭시의 도시개발계획으로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국내의 대기업들과 정부가 힘을 모아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1995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 곳은 상하이임시정부청사의 12배에 달하는 규모로서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 자료, 독립신문이나 광복군 자료 등 많은 사료들이 5개의 건물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피눈물나는 우리나라의 일제 식민지시대를 잘 말해주는 비극의 역사의 한장면이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럼 임시정부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부터 시작하였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라는 일념에 검색을 하여 보았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을 목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왔다
지역도 다양하여 미국이나 중국 소련등 각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 동북지역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등 위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많으며 한국 본토와 소련 과 중국동북지역 등의 집합체로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 진다

검색하여 올려보면 이렇다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내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월 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 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상해 1919)·항저우[, 항주 1932]·전장[,진강 1935]·창사[,장사 1937]·광저우[, 광주 1938]·류저우[, 유주 1938]·치장[長 기장 1939]·충칭[,중경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石장개석]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신한청년보()》·《공보()》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을 광둥[]의 쑨원[중산 文 손문 ]이 세운 호법정부()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중경)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