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및 기행문

발해 역사는 중국 역사로 변하였다

泉玟 김동석 2016. 2. 9. 21:56

발해 역사는 중국 역사로 변하였다

2015년 8월 10일 돈화 여행기

아침 8시반에 돈화로 떠났다 연길에서 서북쪽으로 3시간정도 소요되는곳으로 하늘이 곳곳에 뭉게구름이 떠 있었으며 어느곳은 비가 오는곳도 있었다 내가 가는길에도 터널을 지나니 비가 십분정도 쏟아졌다 소낙비로 굴지성비였다

조금 지나니 언제 비가 왔다는듯 하늘이 맑았고 약간 더위를 느꼈다

먼저 六鼎山문화 여행구를 찾았다 시간이 11시 40분이라 먼저 식사를 하기위해 주변을 돌아보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냉면집이 있었다 이름만 냉면집이지 음식이 다양하였다 모처럼 맛있는 냉면에 입장료도 10원 저렴하게 구입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을 들렸다 깨끗하고 양변기로 되어있어 너무 편하게 뒷일을 볼수잇어 주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고 나와서 동화 육정산 문화여행구를 들러보았다 52만 평방미터에 핵심지역 10만평방미터에 불교문화원구 발해문화원구 청시조문화원구등 8개 공원조성으로 되어 있어 도보는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는 곳이었다 

청조사발상지 기념관을 보고 금정대불을 보기위하여 불교 예술관과 정각사등 절경내를 올라올라 정상에서 금정대불을 보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돈화시는 물론 멀리 연길이나 길림 그리고 안도현이 멀리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와 옥불원에 가서 와불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웅장하고 정중하게 누어있는 불상을 볼수 있었다

해동성국 발해유적지를 보았다 정해공주 묘도 보고 비석도 보았다 여기는 산이름이 달랐다 六頂山 古墓群으로 여러 묘지들이 발견된곳이다 이외에도 나중에 한어책과 번역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니 돈화 길림 연길 화룡 안도 왕청 훈춘 도문 목단강등에서 이러한 유적이 많이 나오고 성터나 고분 생활용기들이 많이 출토 되었다고 읽었다

발해는 고구려 장수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나라를 세워 15대 왕조를 거치면서 고구려보다도 더 큰 땅을 확장하였다 소련의 사할린까지와 요녕성과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 원산까지 영토가 되었으며 해동성국으로 일본이나 당나라 거란과 통일신라와 교역이나 문화도 발달을 시킨나라로 지역이 중국땅에 있으니 한마디로 말하여 발해역사는 중국역사가 된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로만 배울게 아니라 남북국시대라 칭해야한다는 유득공의 발해고에 표현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빠른시일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이 들며 북한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한다니 우리 남한도 남부국시대 223년을 역사에서 가르켜야 할것이다 비록 거란에 의하여 망하기는 하였으나 발해는 우리의 역사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입구에 있던 발해 유적 박물관을 돌아보니 더 뚜렸한 중국의 역사관이 보이고 이것이 동북공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걱정만하지말고 우리는 우리대로 온국민이 역사인식을 바로 배우고 바로 익혀서 혹여 역사를 이야기 할때는 강력하게 주장할수있는 지식을 겸비해야한다는 것이다

발해광장에 가면 넓은곳에 발해의 역대 왕 대보영시조부터 15대왕까지 업적비와 모형상을 세웠는데 대단한 발상이고 또 모든이들에게 동북삼성의 땅이 중국역사였다는 이야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역사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다시 정립을 할때가 온듯하다

이렇게 2015년 8월 10일 하루도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돈화를 이렇게 여행하면서 많은것을 느꼈다 역사를 재 정립해야하는 시기인듯하다


























































































































































 

발해국(渤海國)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를 건국한자는 누구인가?

- 발해를 건국한 사람은 대조영이라는 사람입니다.

고구려 사람이었는데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로 가게 됩니다.

대조영은 송화강 유역에서 살다가 당나라에 의해 강제로 조양에 끌려가게 되죠.(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더 편하게 지배할려고..)그런데 대조영이 거기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일어나서 조양을 탈출하고 가다가 동모산에서 발해건국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1년후 성산자 산성에서 발해를 세웠습니다.

 

발해는 이전의 어느민족, 어느 국가를 계승하였는가?

-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고구려는 부여족입니다. 즉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부여민족에 속하죠.

 

발해 문화의 근원은 어디인가?

-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니 문화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였습니다. 발해의 정혜공주무덤이나 발해 건물터, 발해토기..기와등...의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고구려와 닮아있다는걸 알수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발해의 각종제도는 어느 나라의 것과 관련이 있는가?

- 발해는 처음엔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점차 사이가 좋아져 각종 제도를 당나라에서 받아들여 발해식으로 만들어 정치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당나라것만을 따라서 만든건 아닙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제도도 있었으며...

그외 나머지는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발해 유민은 어디로 유입해 갔는가?

- 요나라(거란족)에 의해 발해는 멸망했습니다. 갈곳이 없던 발해 유민들은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고려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고려는 고려 시조인 태조가 집권하던 시기였습니다.

 

위와 같은 주제를 놓고 연구한 각나라의 주장

( 남북한, 일본,러시아,중국)을 조사하기

 

남북한 같은 경우는 발해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한거 아닌가요? 우리 역사인데..)

일본, 러시아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은 동북공정프로젝트에 의해 고구려에 이어 발해도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발해를 자신의 나라에서 나온 지방(부족)국가라고 하고 있죠.)

.1784년(정조 8)에 유득공이 지은 것으로 한국 최초의 발해사가 발해고(渤海考) 입니다.

 

.발해고의 구성은〈군고 君考〉·〈신고 臣考〉·〈지리고 地理考〉·〈직관고 職官考〉·〈의장고 儀章考〉·〈물산고 物産考〉·〈국어고 國語考〉·〈국서고 國書考〉·〈속국고 屬國考〉의 9고(九考)로 구성했는데,  이는 정사(正史)의 세가(世家)·전(傳)·지(志)의 형식을 딴 것입니다. 사(史)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도 자료가 부족하여 사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군고〉는 역대 왕의 약전과 사적이다. 대조영의 아버지 진국공(震國公)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으로 고구려에 귀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고〉는 열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약 83인의 인물이 수록되었다. 비록 짧은 기록들이기는 하나 사실만 간략하게 적었을 뿐 주자학적인 가치평가나 사론은 없습니다.

<지리고>는 5경15부62주를 〈신당서〉와 〈청일통지 淸一統志〉에 소개된 내용으로 각각 전재했습니다. 지명마다 저자의 고증은 붙이지 않고 끝에 5경의 위치와, 발해와 신라의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간단한 비평과 고증을 했습니다. 〈의장고〉는 공복제도, 〈물산고〉은 토산물이며, 〈국어고〉는 발해의 칭호로, 왕을 가독부(可毒夫)·성왕(聖王)·기하(基下), 명(命)을 교(敎), 왕의 부친을 노왕(老王)이라 했다고 한다. 〈국서〉는 무왕·문왕이 일본에 보낸 것이다. 〈속국고〉은 정안국(定安國)에 관한 것으로 마한의 종(種)이라고 보았습니다.

 

.발해고의 자료는 책머리의 인용서목에 따르면 〈삼국사기〉·〈고려사〉 등 우리나라 책과 〈당서 唐書〉·〈오대사 五代史〉·〈요사 遼史〉·〈송사 宋史〉·〈일본일사 日本逸史〉·〈속일본기〉·〈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성경통지 盛京通志〉·〈문헌통고〉·〈통전 通典〉·〈만성통보 萬姓統譜〉 등 22종의 책을 참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발해

渤海 ]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통치하였던 국가인 발해는그 영역이 동북 3성과 연해주 남부한반도 북부 일대를 포괄하고 있었다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정치적 · 군사적 거점 지역에 5()을 설치해 국가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5경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중경(中京)은 허룽(和龍), 상경(上京)은 닝안(寧安), 동경(東京)은 훈춘(琿春), 서경(西京)은 린장(臨江), 남경(南京)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으로 보고 있다.

해동성국(海東盛國발해가 주변세계와 통하는 주요 국제 간선로는 영주도(營州道) · 조공도(朝貢道) · 거란도(契丹道) · 신라도(新羅道) · 일본도(日本道등 5도가 있었다영주도는 상경에서 영주까지 연결된 도로로 당나라의 장안까지 이어지는 주요 도로다조공도는 압록강과 바닷길을 통해 중국 산둥의 등주(登州)까지 나아가는 길이다거란도는 상경에서 현 지린(吉林일대에 위치했던 부여부(夫餘部)를 통해 거란의 수도와 연결된 후 북방 초원로와 통하는 국제 도로다신라도는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와 교류하는 길이며일본도는 동경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발해는 이 사통팔달한 교통망을 통해 주변세계와 호흡을 함께하고 있었다발해의 고지(故址)에서는 발해와 주변국가들은 물론멀리 중앙아시아와도 교류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극동 러시아의 옛 발해 터였던 노보고르데예프카성(밖 취락지에서 발견된 8세기의 소그드 은화는 당시 발해가 북방과의 모피 교역로였던 거란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 지역과 교역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발해의 동경이던 훈춘(용원부(龍原府))에서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삼존불상(三尊佛像)이 발견되었는데이는 발해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의 기묘한 융합 양상을 시사해준다.

발해의 옛 성터 노보고르데예프카에서 출토된 소그드 은화(앞면뒷면)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渤海]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창비)

 

발해고(渤海考)는 조선 정조 8(1784)에 규장각검서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주해 1] 이 발해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이다. 1권본과 4권본의 두 종류가 있다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부른 최초의 역사서이다.[1] 《발해고》는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 중 최초의 발해 전문 역사서이다.[2]

목차

 [숨기기

· 개요

· 구성

· 내용 

o 3.1 박제가의 서문

o 3.2 류득공의 서문

o 3.3 군고(君考)

o 3.4 신고(臣考)

o 3.5 지리고(地理考)

o 3.6 직관고(職官考)

o 3.7 의장고(儀章考)

o 3.8 물산고(物産考)

o 3.9 국어고(國語考)

o 3.10 국서고(國書考)

o 3.11 속국고(屬國考)

· 인용 서적

· 5 1권본과 4권본 비교

· 평가

· 한글 번역서

· 관련 서적

· 함께 보기

· 10 주해

· 11 주석

개요[편집]

《발해고》는 조선 정조 때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발해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서가 없음을 통탄하며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하여 직접 저술한 발해에 관한 역사서이다조선 정조 8(서기 1784)에 1권본을 완성했고나중에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4권본을 완성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으나나중에 펴낸 4권본은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구성도 많이 달라지고 내용도 약 35% 정도 증가하였다.[3]

구성[편집]

《발해고》 1권본은 서문과 총9개의 고()로 구성되어 있다.[4]

· 서문: 발해국 왕계도, 성해응의 서문, 박제가의 서문, 류득공의 서문으로 되어 있다.

1. 군고(君考): 발해의 왕에 대한 고찰진국공 걸걸중상과 고왕 대조영으로부터 발해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주요 치적을 기록하였다.

2. 신고(臣考): 발해의 신하에 대한 고찰대문예 등 발해의 여러 이름 있는 신하들의 주요 업적을 기록하였다.

3. 지리고(地理考): 발해의 지리에 대한 고찰신당서요사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 인용하였다.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다.

4. 직관고(職官考): 발해의 주요 관직에 대한 고찰문관 직제와 무관 직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5. 의장고(儀章考): 발해의 의식 및 복장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직관고에 편입되어 있다.

6. 물산고(物産考): 발해에서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고찰토끼다시마된장사슴돼지명주붕어오얏은에 대한 설명이 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7. 국어고(國語考): 발해의 언어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8. 국서고(國書考):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

9. 속국고(屬國考): 발해를 계승한 나라인 정안국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

내용[편집]

박제가의 서문[편집]

조선 정조 때 실학자로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는 친구인 류득공이 저술한 《발해고》에 대해서 자신이 예전에 검토했던 바와 부합한다고 하면서 이 책을 크게 칭찬하였다.[5]

내 친구 류혜풍(류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중략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고려 왕씨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이에 내가 전에 검토한 바와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왕도와 패도의 지략을 엿볼 수 있는 류혜풍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류득공의 서문[편집]

류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이 책을 짓게 된 동기를 직접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부여씨[주해 2] 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무릇 대씨는 누구인가바로 고구려 사람이다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류득공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망하고 그것을 계승한 고려가 《삼국사[주해 3] 를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그러나 고려가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도 계승하였으므로 마땅히 남북국사를 지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발해는 고려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대해서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왜냐하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므로 반드시 사관이 있었거나 역서사라도 있었을 것이며만약 없었더라면 세자에게 물어보아서라도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고려 사람이 10여 만 명이나 되는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서도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하였다이에 류득공이 규장각검서로 일하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9()를 만들었다고 하였다이를 세가(世家), (), ()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6]

군고(君考)[편집]

군고(君考)는 발해의 역대 임금에 대한 고찰이다진국공(震國公)은 성이 대씨(大氏)이고 이름이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속말말갈(粟末靺鞨人)이다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大祚榮)은 진국공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아버지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이해고의 공격을 받아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해 도망하다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이끌고 이해고를 크게 격파하였다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성력 원년(서기 698)에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震國王)이 되었다당나라 현종 2(서기 713)에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자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다무왕 대무예(大武藝)는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서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개원 20(서기 732)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주해 4] 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문왕 대흠무(大欽茂)는 무왕 대무예의 아들로서 당나라에서 안녹산과 사사명이 내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소탕하는데 협조하였다이 공로로 보응 원년(서기 762)에 발해국왕에 책봉되었다.[주해 5] 문왕의 뒤를 이어 폐왕성왕강왕정왕희왕간왕선왕이 있었으며계속하여 왕 이진왕 건황왕 현석왕 인선에 이르렀다.[주해 6] 왕 대인선(大諲譔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는 신책 4(서기 925발해를 공격하였고천현 원년(서기 926발해의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었다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을 동란국(東丹國)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인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으며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발해 지역의 동란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신고(臣考)[편집]

신고(臣考)는 발해의 이름 있는 신하들에 대한 고찰이다대문예(大門藝)는 무왕 대무예의 동생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다무왕이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대야발은 고왕 대조영의 동생이다장문휴는 무왕 때의 대장이다이진몽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활쏘기를 보여주고 발해 음악을 연주하였다양승경은 문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으로부터 정3위의 벼슬을 받았다일만복은 문왕 때 325명을 데리고 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일왕은 일만복이 가져온 발해의 국서에서 발해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한 점그리고 일본에 대해 고구려 때는 형과 동생의 나라라고 부르다가 발해 때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라고 부른 점을 들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였다사도몽은 문왕 때 187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겨우 46명만 살아남았다여정림은 강왕 때 68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하여 오랑캐의 땅인 지리파촌에 도착하여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다불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월중국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왕문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격구 경기를 해 보였다고모한은 고송이라고도 하는데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자 고려로 피신하였다가 나중에 요나라로 돌아와 중대성 좌성을 지냈다대광현(大光顯)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세자로서 고려 태조 17(서기 934) 7월에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태조 왕건이 발해의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붙여주었으며 그에 딸린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병사들에게는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대광현의 아들은 대도수인데 고려 현종 때 대장이 되었다그 후손 대금취(大金就)는 고려 고종 때 대장이 되어 몽고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영순군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영순 태씨의 시조가 되었다박승은 고려 태조 21(서기 938)에 발해의 유민 3천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도망을 왔다.

지리고(地理考)[편집]

지리고(地理考)는 발해의 주요 지리에 관한 고찰이다신당서요사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 인용하였다.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다류득공은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5, 15, 62주에 대해 인용하였다발해의 5경은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이고, 15주는 용천부현덕부용원부남해부압록부장령부부여부막힐부정리부안변부솔빈부동평부철리부회원부안원부이다류득공은 《발해고》 1권본에서 발해의 5경 중 상경 용천부는 지금의 영고탑이고중경 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고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해성현이며서경 압록부는 지금의 압록강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그러나 류득공은 《발해고》 4권본에서 상경을 영고탑중경을 길림동경을 경성남경을 함흥서경을 강계 동북 200리의 압록강 건너편으로 다르게 비정하였다.[주해 7] 류득공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도 인용하였으나요사》에 기록된 많은 오류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동일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류득공은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도 인용하여용천부현덕부용원부남해부부여부심주개주부주삼로군홀한하상경성평양곽주모주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직관고(職官考)[편집]

직관고(職官考)는 발해의 주요 관직에 대한 고찰이다문관 직제로서 선조성중대성정당성과 충부인부의부작부창부선부지부예부신부융부계부수부중정대전중시종속시문적원태상시사빈시대농시사장시사선시주자감항백국에 대해 서술하고무관 직제로서 좌맹분위우맹분위좌웅위우웅위좌비위우비위남좌위남우위북좌위북우위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였다.

의장고(儀章考)[편집]

의장고(儀章考)는 발해의 주요 의식과 복장에 대한 고찰이다. 3[주해 8] 이상은 자줏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금어대를 휴대한다. 5질 이상은 주홍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은어대를 휴대한다. 6질과 7질은 옅은 주홍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8질은 녹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물산고(物産考)[편집]

물산고(物産考)는 발해의 주요 생산물에 대한 고찰이다태백산의 토끼남해부의 다시마책성부의 된장부여부의 사슴막힐부의 돼지솔빈부의 말현주의 베옥주의 면용주의 명주위성의 철노성의 벼미타호의 붕어환도의 오얏악유의 배부주의 은에 대한 설명이 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국어고(國語考)[편집]

국어고(國語考)는 발해의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왕을 가독부성왕기하라 부르며왕의 명령을 교()라 한다왕의 아버지를 노왕어머니를 태비처를 귀비라 하고맏아들을 부왕(副王), 나머지 아들을 왕자라 한다관품은 질()이라 한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국서고(國書考)[편집]

국서고(國書考)는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대한 고찰이다.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발해의 왕이 일본 일왕에게 보내는 국서 총6편이 실려 있는데속일본기일본일사일본후기유취국사》 등에 실린 국서를 인용한 것이다6편으로서 발해 무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발해 문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발해 강왕이 일본국 환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4편이 실려 있다무왕 대무예가 보낸 국서에는 "무예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발해가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였다.

속국고(屬國考)[편집]

속국고(屬國考)는 발해를 계승한 나라인 정안국에 대한 고찰이다.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주해 9] 종족으로 발해가 거란에 격파되자 그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정안국 왕 오현명(烏玄明)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거란이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할아버지가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렀다고 한다정안국 왕 오현명은 송나라 태종 6(서기 981)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근래에 부여부가 거란에서 등을 돌리고 정안국에 귀순하였으니 곧 거란이 쳐들어올 것이라면서송나라와 정안국이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하자고 제안하였다고려 현종 9(서기 1018)에 정안국 사람 골수(骨須)가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인용 서적[편집]

류득공의 《발해고》는 다음 24종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작성했다.[7]

구당서신당서오대사송사요사자치통감삼국사[주해 3]고려사동국통감속일본기일본일사일본후기유취국사통전통지문헌통고문헌비고대명일통지청일통지성경통지만성통보영순태씨족보여지승람전당시.

1권본과 4권본 비교[편집]

류득공의 《발해고》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수정 보완되었다류득공은 조선 정조 8(1784)에 1권본을 완성한 후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이후 4권본을 지었다비록 《발해고》 4권본은 류득공의 사망으로 인해 단독 서적으로 출판되지 못하였으나이후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합본되어 출판되었다류득공은 《발해고》 1권본에서 9()로 되어 있던 구성을 크게 변경하여 4권본에서는 5()로 통폐합하고그 대신 상대적으로 부실하였던 지리고(地理考)를 대폭 정비하였다특히 발해의 강역에 대해 1권본에서는 《요사》의 기록에 따라 요동을 중심으로 비정하였으나, 4권본에서는 조선 북부 지방과 길림 및 흑룡강 일대로 비정함으로써 현대 역사학계의 의견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8] 또한 1권본에서는 발해의 멸망 시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4권본에서는 발해 멸망과 그 이후 시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으며신고(臣考)의 뒷부분에 흥요국 관련 인물들을 추가하여 발해 멸망 이후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에 대해서 1권본에서는 발해의 속국으로 잘못 보아 속국고(屬國考)에 넣었으나, 4권본에서는 오류를 인식하고 제목을 정안국고(定安國考)로 수정하였다이와 같이 《발해고》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많은 자료가 추가되고 오류가 수정되었는데이를 통해 류득공의 발해에 대한 인식이 더욱 정확하고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평가[편집]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류득공의 《발해고》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하고 발해를 한국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의 강역이 한국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또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불러서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1] 발해고의 1권본에 실린 지리고(地理考부분은 오류가 많은 중국 《요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많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으나이후 4권본에서 오류를 대폭 수정하여 발해의 위치를 현대 역사학계에서 비정하는 위치와 거의 동일하게 이해하였다.[9]

류득공이 《발해고》에서 주장한 남북국시대론은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사학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10] 반면 중국학자 쑨위량(孫玉良손옥량)은 남북국시대론을 만들어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킨 사람이 류득공이라고 혹평하면서발해와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았다.[11] 박시형김혁철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고 있으며후기 신라와 발해가 병립하였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고 있다.[12]

류득공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발해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당당한 제자리를 가지고 우리 민족사에 포함되어야 할 나라라는 의미에서 후기 신라의 병립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였던 것이다이것은 우리나라 왕조사의 시기구분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사 편찬에서 특기할 만한 기여를 한 것으로 된다.

 

한글 번역서[편집]

《발해고》를 한글로 번역한 책은 다음과 같다.

· 류득공 지음송기호[주해 10] 옮김《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 류득공 저정진헌 역《발해고》(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서해문집, 2006년 1월 25.

관련 서적[편집]

· 발해국기(渤海國記)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이 지은 발해에 관한 역사서이다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신당서》〈발해전(渤海傳)〉에서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발해의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주요 내용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1935년 만주 랴오둥(遼東)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김육불)가 저술한 발해의 역사서이다.

·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 말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기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다발해를 고구려·백제·신라·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조선의 실학자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이 순조 11(1811)에 편찬한 우리나라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이다.

· 규원사화(揆園史話)조선 숙종 원년(서기 1675)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고 하는 역사서이다후대에 조작된 위서(僞書)라는 주장도 있고진서(眞書)라는 주장도 있다.

· 단기고사(檀奇古史)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8세기 경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이다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후대에 조작된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

· 발해고(渤海考)《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 류득공

· 발해

· 발해의 역대 국왕

주해[편집]

1. 이동  류득공(柳得恭)은 '유득공'이라고도 한다여기서는 柳를 ''로 통일시켜 표기했다.

2. 이동  여기서 부여씨는 백제의 왕족을 말한다.

3. ↑ 이동  여기서 《삼국사》란 고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말한다현전하는 《삼국사기》의 표지에는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다.

4. 이동  등주(登州)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에 있는 봉래용구 등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5. 이동  당나라는 서기 76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목적이기는 하지만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였다.

6. 이동  왕 대현석(大玄錫)과 왕 대인선(大諲譔사이에 적어도 왕 대위해(大瑋瑎한 명이 더 있었다그러나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할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194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만주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김육불)에 의해 왕 대위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7. 이동  오늘날 발해의 상경 영고탑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으로 보고 있고중경 길림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이고동경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이고남경은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이라고 보고 있다.

8. 이동  질()이란 발해에서 신하들의 등급을 표시하는 말이다발해에서는 정12품 등의 품()이라는 용어를 질()이라고도 하였다.

9. 이동  여기서 마한(馬韓)은 고구려를 일컫는 말로서정안국이 고구려 종족이라는 뜻이다오늘날 마한은 백제에 흡수된 것으로 보지만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이고변한이 백제이며진한이 신라라고 하였다.

10. 이동  송기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서 발해사 전공이다.

주석[편집]

1. ↑ 이동  송기호류득공과 『발해고』〉《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28.

2. 이동  박인호〈『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한국사학사학보》 6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 35.

3. 이동  송기호류득공과 『발해고』〉《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23.

4. 이동  류득공 지음송기호 옮김《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5. 이동  박제가박제가의 서문〉《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37~39.

6. 이동  류득공 지음송기호 옮김《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42.

7. 이동  류득공 지음송기호 옮김《발해고》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 44.

8. 이동  박인호〈『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한국사학사학보》 6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 59.

9. 이동  박인호〈『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한국사학사학보》 6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 58.

10. 이동  이원희〈사서로서 『발해고』에 대한 고찰〉울산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1.

11. 이동  孫玉良〈柳得恭與渤海考〉《學習與探索》, 1986.

12. 이동  김혁철〈실학자 류득공의 발해 역사관〉《력사과학 론문집》 16, 력사편집부 편평양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1,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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