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민단(義民團) 이영호 씀
1. 서론
의민단(義民團)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제한적이다. 가끔 중・고등학교 국사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다루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논문[김선자 논문집]등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구체적인 자료들을 열거하며 중요한 테마로 다루고 있었다. 다만 소설 부분에서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의민단 작가는 그동안의 학계자료들과 작가 스스로 수집한 것들을 한 권의 소설로 그려내 보았다. 먼저 2012년 5월30일, 평화방송 뉴스를 먼저 들어보자.
[혹시, 일제강점기에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독립군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 ?독립군 의민단?의 항일 독립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독립군 의민단?이란 제목의 이 책은, 간도지방 천주교 교우촌을 중심으로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이 항일독립운동에 동참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요, 간도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하던 최문식 신부의 납치란 역사적 사건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의민단의 기록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식민지로부터 망명한 간도지역 신자들, 그리고 주민들의 삶과 신앙을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한마디 한다면, 소설 의민단(義民團)은 허구(虛構)와 실재(實在)가 혼합된 문학 작품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논문과 달리 부분적인 작가의 역사 왜곡과 편견이 끼어 들 수 있으며, 독자의 폭 넓은 이해를 호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민단(義民團)은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풀기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의민단(義民團)은 역사적인 진실 게임외에 역사철학과 역사신학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 의민단을 소개하는 지면에서 예상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답변 역시 궁색함을 솔직히 고백한다. 작가의 능력으로 볼 때 문제 핵심에 대한 전문 지식의 부족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기에 답변 역시 객관적인 답변이 아닌 주관적인 지식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더욱이 교회에 대한 주장들은 더욱 그러하다.
의민단이란 이름으로 일어나는 제반 문제는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철학자 및 신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작가의 눈높이는 평범한 시민의 시각임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의민단(義民團)이 극동 아시아 역사 문제에 있어서 분열의 출발점이 아니라 일치의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2. 본론
1). 여러 가지 질문들
➀. 의민단의 최문식은 누구인가?
➁.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성장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➂.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 마르꼬 신부는 누구인가?
➃.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 마르꼬의 연표는 어떠한가
➄. 연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어느 것인가?
➅. 독립군 의민단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
➆.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의 현실 참여 정신은 무엇이었나?
➇. 손문과 강도영은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가?
➈. 의민단과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은 무엇이 다른가?
➉. 의민단과 해방신학은 같은가?
⑪. 의민단의 출현에 대한 교계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⑫. 역사의 퍼즐 조각은 완전히 보존되어 가는가?
⑬. 의민단에서 다물왕국이란 무엇인가?
⑭. 최문식 신부가 간도에 남긴 역사적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까?
① 의민단의 최문식은 누구인가?
답]
1- 충남 공주시 유구면 鳴谷里 서재에서 출생.
부친 江陵 崔氏 제환(濟煥, 요한)의 장남.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덕리
(忠南 天原郡 木川面 西德里)를 거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쇠재(京畿道 龍仁市 處仁區 二東面 德成里 金峴)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족들 - 故 崔炳玉[二東面 面書記]와 작은 조카 故 崔炳黙씨]
②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성장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답] 쇠재 서당(書堂)에서 5년간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등을 배웠고, 미리내 본당 신부, 강도영 마르꼬 신부의 추천을 받아 1900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여 29세가 되던 1910년 9월 24일 사제(司祭)로 서품(敍品)되었다. 최문식 베드로는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0년 동안 여름과 겨울 방학을 통하여 스승인 강도영 마르꼬 신부의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동안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③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 마르꼬 신부는 누구인가?
답]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에 이어 세 번째 사제로써 한국 현대사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계몽 운동가였다.
④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 마르꼬의 연표는 어떠한가?
답] 1863년에 태여나 1929년 사망에 이르기 까지 가톨릭 사제로써 품위를 유지하며 한국 사회에 기여한 근대 격동기의 주요 인물이다. 중국의 손문과 동시대 인물로써 비교되는 인물이다. 강도영이 최문식과 같은 인물을 직제자로 두었다면, 손문은 장개석을 직제자를 두었다. 물론 이 둘의 비교 연구가 동일성과 유사점이 발견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천주교 사제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이 둘의 비교 연구는 분명 극동의 근대 역사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되고 있다.
연표[손문과 강도영, 그리고 장개석과 최문식 중심]
1863.8.6 |
강도영 마르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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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1.12 |
손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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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5.16 |
최문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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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1 |
백두산 정계비 |
고종18년, 중국에서 길림장군 명안(銘安), 흠차대신 오대징을 보내어.....,[의민단 247쪽] |
1882. |
손문-미국 유학 |
호놀루대 수학 |
1882. |
조선 유민 입적령 |
두만강 이북의 조선 유민 입적 강요 |
1883.❀-2 |
백두산 정계비 |
조선측은 어윤중, 김우식을 보내어..[의민단 247쪽] 9월에 안변부사 이중하....,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
1883.12.7 |
강도영 유학[폐낭] |
인천-부산-일본-홍콩-싱가포르-폐낭[말레지아] |
1886 |
장개석 |
1886 - 1975 [손문의 사상 승계자] |
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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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 공항 |
1892.6.20 |
강도영 귀국후 수학 |
용산 예수성심대학 |
1892. |
손문 의사면허 취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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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이홍장에게 서신 |
손문의 청의 정부에 대한 개혁 요구 |
1894. |
동학란 |
조선-청의 차병 요청 |
1894.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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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2400명 아산만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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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조약에 의거 일군 서울-인천 주요 거점 확보 | |
1894.7.23 |
친일 정권 수립 |
흥선 대원군 앞세워 친일 정권 수립 |
1894.7.25 |
청일 전쟁 발발 |
선전 포고 없이 기습 공격 |
1894.9.17 |
황해 해전 - 청의 북양 함대 격파 | |
1894.10.24 |
압록강 넘어 본토 침공 | |
1894.11.6 |
금주성 점령 | |
1894.11.22 |
여순 점령 | |
1894.12 |
동학란 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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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8.20 |
을미사변[정파 싸움] 흥선대원군-친일파 |
(고종 32)년에 일본의 자객(刺客)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 |
1895. |
시모노세키 조약 |
*배상금 2억량[3억엔] *요령 반도[3000량 반환]. 대만. 펑후 할량 [영, 독, 프의 강력한 요구로 요령반도 반환] *소주등 4개 도시 개방 |
1895. |
손문의 [영국 조난기] |
중국 본토에서 손문의 국민봉기[동학란 모방]후 실패- 유럽으로 망명 중 체포 직전 구출 후 수기 |
1896. 4. |
강도영 서품 |
미리내 발령[안성, 양성, 용인, 진위, 수원, 이천] |
1897. |
해성학교[안성1호] |
계몽활동 개시, 양잠학교, 제사공장 설립 |
1897. |
손문의 흥중회 |
손문은 일본에서 재결집 |
1900. |
의화단의 난 [산동 중심- 무술 단체] |
신흥 불교도를 중심으로 민중의 외세 저항 운동 -그리스도교 괴멸 시도(천주교, 개신교 포함) -천주교 사제 100여명, 신자 30,000명 희생 -靑-초기에는 진압 시도, 후기 적극 동조...유럽연합군에 진압 당한 후 재산 및 인명 살상 배상 -의화단의 난은 청(靑)나라 멸망의 중대한 원인중 하나로 등장 |
1905. |
러일 전쟁 |
1월15일 - 러시아 점령지 여순항 기습 공격 3월 - 심양대전[러시아 패망] 9월5일 - 러시아 자존심, 발틱함대 침몰 - 포즈마 회담 -*일본의 조선 지배 인정 -*만주 여순항, 사할린 남부 포기 -*조선은 패전국, 조선의 무력화 |
1905. |
중국 혁명동지회 |
-망명가 연합---화교들 적극적인 지원 *1. 청의 전복 *2. 민주공화국 건설 *3. 외국 열강 추방 ✧ 손민의 삼민정책 - 민족, 민주, 민생 |
1906. |
용정 신화 |
용정 마을1/2 매입, [최문화, 김일용] |
1907. |
헤이그 밀사-이준 |
조선의 국권회복 실패 |
1907. |
삼애학교 설립 |
김인학, 김일용등 현대식 학교 설립 |
1907.❀-3 |
간도 파출소 |
간도는 조선 땅 - 파출소 설치 |
1907. ➤ 1911. |
중국 [손문 지지파] 혁명동지회 봉기 |
* 1907년부터 4년 이상 계속적인 봉기 실패. * 1911년 양즈강 우한 봉기 최초로 성공 * 양즈강 전역으로 지지 확산➧[손문 해외 망명중] |
1909.10.26. |
안중근 의거 |
이토 히로부미 저격 |
1909.9❀-4 |
간도협약 |
간도는 중국 땅 - 간도 철도권과 무순 탄광권 |
1910.8.29 |
한일합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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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최문식 간도 파견 |
만주 간도성 연길현 팔도구시 천주교회 주임신부 해동학교 개설 -동국역사, 중등동국사략. -지리 -조선어[94쪽] 신용조합 개설 -농협, -신용금고등 |
1910.❀-5 |
대청국 조례 |
대청국 조례 세칙 반포 |
1911.12.25 |
손문 귀국 |
상하이로 공개적 귀국 |
1911.12.29 |
대총통 선출 |
손문 지지자들, 14개 성 대의원 대회에서 만장일치 |
1912.1.1 |
손문의 중화민국 선포와 최대 정적 원세개와 담판[내란 방지책] |
* 손문의 대총통 취임과 중화민국 선포 * 원세개와 담판 조건[손문 정권 이양] -1, 청의 황제 퇴위 -2, 공화국 설립[총선에 의한 의회 구성] -3, 수도 이전 북경➨남경 |
1912,2.12 |
황제 푸이 퇴위(退位) |
*연금 보장, 황제 칭호 보존 |
1912.2.13 |
손문 대총통 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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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3.10 |
원세개 대총통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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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2. |
국회의원 선거 실시 |
국민당 대승[손문 지지파], 원세개 대패 |
1913,3 |
국민당 당수 암살 |
국민당 당수 송교인[1882.4.2 - 1913.3.22] 암살 |
1913.11 |
국민당 해산 |
손문 체포 명령 ➠ 일본으로 피신 |
1914. |
원세개 왕조 선포 |
*원세개 새로운 왕조 - 선포 지지자 냉무 *손문의 중화 혁명당 조직 |
1914. --- 1918 |
세계1차대전 1914.7 - 1918.11 |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의 전투 |
1916.6. |
원세개 사망 지방 군벌 약진 |
왕조 철회로 지지 회복 기도하였으나 실패. 측근까지 수수방관, 냉담..., 지속적인 고립 후 병사 |
1917 |
손문의 광동정부 |
지방 군벌간 내전 발발 |
1919. |
코민테른 |
(Communist International) |
1919.2.8 |
간도, 33인독립선언 |
국자가하창리 연길도윤서외교관원 박동원자택 |
1919.3.1 |
독립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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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3 |
의민단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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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3 |
간도 만세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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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6 |
80만원 강도 사건 |
오랑케 고개길에서의 일본 무역상 강도 사건 |
1920.10.21 |
청산리 전투 |
의민단 참여 |
1921.5. |
신상원, 보니피시오 주교서품 |
간도성[만주] 관활 한국교회 대표 주교 서품식. 민대주교와 사이토 총독의 대 국민을 향한 연설로 유명한 일화 탄생, 그들은 모두 청산리 전투의 한국 교회 참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청산리 전투이후 일본의 독립군 및 일반인 대학살 사건, 신자 2,000여명 이상 학살 내용......,] |
1921. |
경신년 대학살 | |
1021. |
중국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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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조선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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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연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어느 것인가?
답] 연표의 핵심은 독립군 의민단이다. 의민단은 어느 날 갑자기 태여 난 아이가 절대로 아니다. 일정 기간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기르고 양육되었으며, 때가 되자 세상 밖으로 태여 난 것이다.
⑥ 독립군 의민단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
답] 놀랍게도 당사자는 천주교 신부였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쇠재 부락의 최문식 베드로 신부였던 것이다. 그는 천주교 사제로서 교회의 뜻을 따라 성직을 성실히 수행하였을 뿐이다. 그는 청산리 전투등, 전쟁에 관한 참여 기록은 한 점도 남기지 않는다. 스승 강도영처럼 계몽활동의 흔적으로 해성학교[海星學校]가 유일하게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교육을 통하여 의로운 삶을 가르치고 있었다. 특히 나라 사랑은 동국역사, 중등동국사략. 지리, 조선어 교육을 통하여 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스승 강도영은 자신이 몸소 체험한 한국 개화기의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최문식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제로써 나라 사랑하는 법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있었다.
⑦ 최문식의 스승, 강도영의 현실 참여 정신은 무엇이었나?
답] 크리스찬적 시각으로 보고 듣고 실천함이었다. 1883년 12월 7일, 말레지아 폐낭으로 유학을 떠나는 날의 기억을 강도영은 최문식에게 몇 차례 반복하여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 들어보자.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35년만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유학길이었다. 명동 성당은 축하의 손님들로 꽉 찼 있었다. 새날이 왔다. 젊음을 상징하는 분홍 한복이 유학생 네명에게 입혀지고, 주교님의 특별 선물도 각자에게 주어졌다. 긴 챙이 달린 모자, 코끝이 유난히 긴 가죽 구두였다. 그들은 그들의 여행안내자와 그들의 짐을 지고 가는 당나귀 마차를 따라 인천 국제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인천-부산-일본-홍콩-싱가포르-폐낭[말레지아]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인천에서 외국 화물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초 겨울이었다. 하늘마져 그들을 반기는 듯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사를 지나 부평에 이르자 합박눈은 진눈개비로 변하고..., 아불사. 한복이 망가지고 있다. 밀가루 풀로 붙힌 동정마져 떨어져 나가고 있다. 유학생 대표, 강도영은 일행을 멈추게 하고 옷 수선집을 찾았다.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품위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끝내 옷수선 집을 찾지 못하자 여관에 머물러 손수 밥풀로 동정을 붙히고, 인두로 옷깃에 날을 세운 다음 화물선에 올랐다고 한다. 양반의 곧은 자세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존심도 화물선에 오르는 순간 깨지고 만다. 화물선 덩치에 기가 죽은 것이다. 유학생, 강도영은 생각에 잠긴다. 도대체 산더미 같은 화물선이 인천 항구에 모여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선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화물선은 인천을 떠난지 7일만에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화물선이 부산항구에 도착하자 그동안의 궁금증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덩치 큰 화물선은 곡물을 실고 있었다. 자동 콘베이어에 의해 짐이 옴겨지고 있었다. 조선의 쌀을 몽땅 퍼 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강도영 일행은 어느듯 일본을 거처 망망 대해로 나와 홍콩을 향하여 가는 중이었다. 이제부터는 안내자도 일본에 남겨두고 유학생 4명만 남았다. 안내자가 당부한 말을 잊지 않으려는 듯 강도영 일행은 양반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이틀 째 버티고 있었다. 일본 남부를 출발할 때부터 날씨는 여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떠날 때, 분홍색 솜바지 저고리 겨울 한복은 한 점 흐트러짐 없다. 양반 자세 흐트러짐 없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어갔다. 양반의 기질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양반의 주방 출입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기에 강도영 일행은 하녀가 밥상을 갖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식음을 전폐한지 이틀만에 사고가 나고 말았다. 몸이 약한 막내가 기절한 것이다. 강도영은 여객선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 차 선원을 만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원에게 조목 조목 항의하였으나 선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이다. 조선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원이었기 때문이다. 강도영을 수상히 여기 선원은 강도영의 안내에 따라 기절한 막내에게 다가왔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한 선원은 막내를 응급 처치하고 여객선의 규칙을 설명해 갔다. 강도영 일행은 그후 식사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분홍색 솜바지 저고리는 열대의 나라, 말레지아 패낭에 도착할 때까지 유지했다는 일화이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국제적 감각을 깨달아 가는 조선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 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제 패낭의 모습을 보자. 그들은 그곳에서 크리스찬적 삶을 몸소 터득해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말레지아, 월남, 미얀마, 필리핀, 일본, 중국등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문 문화권에 속하는 극동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문에 능통했다. 그들의 공통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 당시 정교한 라한 사전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한문에 능통한 아시아 인들은 어렵지 않게 라틴어를 배울 수 있었다. 강도영과 그 일행 역시 한문 실력이 대단했다. 패낭에 도착한지 3개월 만에 라틴어 수업이 가능했다고 한다. 수업은 철학과 신학뿐 만 아니라 화학과 물리, 역사, 지리, 농업과 상업까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때로는 천문학과 독도법까지 완벽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강도영의 농촌 계몽활동은 유학시절 폐낭에서 이미 고도의 농업 기술과 기타 교육등으로 이뤄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최문식의 금융업과 농업의 협동 조합 역시 이미 완벽한 지식을 습득 하였기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강도영의 패낭 교육은 아시아 국제 흐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훌륭한 교수님으로부터 체계적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동료들로부터 각국의 정세를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⑧ 손문과 강도영은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가?
답] 연표에서는 중국의 손문과 강도영, 그리고 장개석과 최문식을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그들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이방인처럼 만나고 스쳐 지나게 된다. 그들은 분명 많은 유사점과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연표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건은 1881년에 있었던 백두산 정계비였다. 손문과 강도영은 동시대의 인물로 그들의 청소년기에 일어났던 백두산 일이었다. 그들은 백두산 정계비 사건을 가슴에 품고 페낭과 미국으로 각자의 유학길을 떠났다. 유학길에서 돌아 올 때하나는 의사요, 또 다른이는 정신적인 의사, 사제라는 독특한 분야를 걷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유학 시절, 직접 보고 느낀 국제적인 감각은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둘 다 병든 인간을 치료하는 의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손문은 병든 사람보다 병들어 가는 사회에 관심을 더 둔다. 그러기에 의사 면허증을 받는 날, 즉시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에게 썩어가는 청국병을 고치라고 호통친다. 청국병, 그것은 겉치례였다. 종이호랑이 말이다. 그러면서 손문은 외세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조선의 동학도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지켜본다. 한류는 이때부터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기절할 만큼 놀람을 금치 못한다. 청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가 조선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문은 북양함대, 즉 종이 호랑이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몸부림친다.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보다 무너져 가는 청국병을 폭로하며 동지들을 모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손문이 날카로운 외침보다는 중후한 북양함대의 뱃고동에 만족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국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포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북양함대는 한발의 포성도 내지 못하고 바닷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북양함대는 손문이 지적한대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 개의 대포도 없는 중국식 군함이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손문의 예리한 관찰력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손문은 [영국조난기] 수필을 거처 유럽 전역에 중국의 망명 인사로 알려지게 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받게 된다. 손문과 비교되는 강도영은 동학난으로 직접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장, 미리내 한가운데 머물게 된다. 의사는 환자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강도영 주변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강도영에게 의병대장이 되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강도영은 천주교 사제가 의병대장이 될 수 없음을 그들에게 설득 시키면서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간다. 강도영은 선각자로서 계몽활동과 사제로서 직무를 빈틈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강도영은 한국 최초로 시성시복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김대건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한국교회는 강도영의 노고로 역사상 최초의 성인이 탄생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손문은 자신의 생각과 꿈이 같은 군중들 틈에서 머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청국의 망국병을 고쳐낼 구원자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중화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선택한 총통으로 추대된 것이다. 손문, 그는 솔직했다. 북양함대가 종이 호랑이였다는 사실을 폭로한 그는 자신 역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총통 자리를 자신의 정적(政敵), 원세개에게 미련없이 이양한다. 정적(政敵)들간의 암투는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함과 동시에 강대국의 간섭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실수였다. 원세개 역시 총통을 지켜낼 인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무정부 상태[1916-1925]로 빠져든다. 손문의 직제자, 장개석이 문무(文武)를 갖추는 1925년까지 무려 10년간의 긴 시간, 한 치도 내다 볼 수없는 암흑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손문에게 장개석이 있었다면, 강도영에게는 최문식이 있었다. 그는 손문과 원세개가 한바탕 난리를 치른 현장, 간도의 중심에 있었다. 무정부 상태[1916-1925]에 방치된 간도는 마적들의 세상이었다. 마적의 종류는 다양했다. 만주는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 중앙 정부가 기력이 떨어지자 지방 정부가 강세를 떨친다. 지방 정부마져 무너지자 소수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고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 많은 세력간의 갈등, 이것이 바로 마적들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마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리는 일본 정규군이었다. 칠면조처럼 얼굴을 바꿔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만을 즐기며 사는 무리들이었다. 두 번째 마적의 무리는 일본 낭인들로 구성된 마피아들이다. 강력한 일본을 등에 업고 멋대로 사는 정치 깡패들이었다. 세 번째는 중앙정부로부터 보급이 끊긴 중국군들이었다. 집단이 살기 위해 저질러지는 마적 행위들이다. 그 다음은 소수민족들의 약진이다. 세력 확장을 위해 이웃을 공격하는 것이다. 독립군의 모습들도 상대방이 보기에 따라 마적으로 분류된다. 특히 일본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마적의 무리다. 그 다음 생계형 마적들이다. 정상적인 직업 생활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무리들이다. 동네 건달들이다. 이들이 소규모 집단으로 모여 폭력으로 쉽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최문식 베드로 신부는 황량한 간도,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천주교 사목자로써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그는 천주교의 신부였다. 한편으로 스승 강도영을 따라 시대가 요구 하는 계몽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해성학교(海星學校)를 통하여 천주교 신자로써 슬기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깨우쳤다. 특히 농협과 신용조합 장려는 간도 주민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갖어다 주었다.
그는 간도의 영웅으로 떠 올랐다.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든 간도에서 그는 많은 마적들의 먹이감으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의 상징인 성당을 신축하고 있었다. 공사장 현장의 모든 물자는 차차로 고갈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현금과 동등한 물품이기에 팔도구 성당이라는 분명한 표시를 해 두었다. 기와에는 최문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절도 방지를 위해서였다. 오늘날에도 팔도구 성당에는 그날의 기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당시 사용했던 모든 기와에는 최문식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공사장 현장을 지휘하던 그는 당연히 대부호로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마적들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찾아 나선다. 이 과정은 그가 그동안 남모르게 쌓아 올린 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흑룡강 끝자락에서 백두산까지 간도의 모든 땅은 한결같이 해동학교와 신협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최문식 베드로의 흔적들인 것이다.
최문식 베드로, 그는 간도의 거목이었다. 그는 천주교 사제였다. 스승 강도영처럼 독립군의 직함도, 그리고 화려한 공적비도 남기지 않는다. 최문식과 대비 되었던 장개석은 문무(文武)를 갖추고 1925년 새롭게 등장한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못했다. 대만으로 밀려나 말년(1975년)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최문식은 1952년 스승 강도영이 잠든 미리내 성지에 묻힌다. 이로써 독립군 의민단의 전설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⑨ 의민단과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은 무엇이 다른가?
답] 의민단이 창설되던 1919년은 국내외로 격동의 시기였다. 1914년에 시작되는 세계 제1차 대전이 1918년에 마무리되면서 1919년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창설과 1921년 중국 공산당에 이어 1925년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기도 한다. 바로 이때 간도에서 발생한 독립군 의민단의 성격 규명은 공산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힘들게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좌우의 개념이 혼합된 상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의민단 역시 격동하는 세계사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공산당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민단은 공산당 개념보다는 안중근의‘동양평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사실 안중근의 평화론 역시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다물(多勿)이라는 고유한 사상이 전래되고 있었는데, 그것은‘고토(古土)를 회복한다’는 뜻이지만,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으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미래 지향적인 국가론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지리적인 국경선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유한 문화가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극동에서 우리가 만일 주도권을 잡는다면 우리에게는 전통적이고 수준 높은 다물(多勿) 사상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 특히 중국과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확실한 대망의 미래가 보인다.
다물(多勿)과 관련하여 한마디만 더 하고자 한다. 유럽 여행을 다녀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독일을 지나 오스트리아, 이태리로 들어가는 국경선은 철조망 하나 없이 간단한 이정표로 마감한다. 국경수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검문소 역시 텅 비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문화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로써 세금을 비롯한 독특한 기초 질서를 자국민 차원에서 지켜가는 것이다. 다물(多勿), 그것은 바로 이런 현상이다. 서울에서 평양과 북경을 거처 가는 동안 어울려 살면서 유럽처럼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다물(多勿)인 것이다.
⑩ 의민단과 해방신학은 같은가?
답] 의민단은 자신보다 훨씬 후대에 나타난 해방신학, 즉 철두철미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해방신학과 거리가 멀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1979년 멕시코 방문 때 “예수님을 정치가, 혁명가, 나자렛의 전복운동자로 보는 해방신학의 개념은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발표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계내 해방신학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에 끝을 맺었다. 교황청은 1984년 및 1986년 두차례에 걸처 해방신학의 맑스주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오류로 결정하였다. 의민단은 결코 맑스주의를 닮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의민단을 해방신학으로 풀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보여진다.
의민단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해방신학보다 훨씬 앞서서 발생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철학으로 의(義)를 숭상하고 불의(不義)에 대한 항거(抗拒) 의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의민단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일이 없다. 의민단의 모습은 [교회가 인간의 권리 특히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교회 자신의 방법으로 투쟁하려한다는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의민단의 뚜렷한 성격 규정은 한국의 교회 신학자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⑪ 의민단의 출현에 대한 교계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답] ?독립군 의민단? 출현은 또 다른 측면에서 교회사 평론가들의 일제 강점기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 시킬 수도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교도권에 대한 지나친 공격 일변도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료를 증거로 자신의 논거를 증명하려 든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 많은 사료들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묻혀 있다는 점을 기억되어야 한다. 의민단 활동이 마무리 되어가는 1921년 5월 1일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자유로운 판단을 기대해 본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에밀리오 드브레 신부의 주교 서품 식후 오찬은 조선호텔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 초대된 사이토 총독의 연설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종교와 그 종교가 주는 지혜로운 교훈은 국민들을 독실하고 경건하며 예의바르게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민의 도덕적ㆍ신체적 안녕을 위해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 항구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에 대하여 민 대주교(閔德孝, Mutel, Gustave Charles Marie)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신 우리 선배들, 그리고 한국 신부들이 모두 용감하다는 말씀을 (사이토 총독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오로지 소중한 제2의 조국,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모든 이들을 향하여 민 대주교는 건배를 제안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파견국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의 영광과 번영을 위하여!”
이때 일본의 사이토 총독은 자신이 제안한 내용과 전혀 다른 응답에 불쾌하였을지는 모르지만, 민 대주교의 제안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하여 건배를 들어야만 했다.(MB1921/1922,11. 분도통사 259쪽)
1921년 5월은 간도에 있어서 청산리 전투 이후 대대적인 독립군 대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때였다. 민간인 3,000여 명 이상이 학살되고 있었으며, 그 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반을 넘고 있었다. 간도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분명 한국교회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핵심단체로 인식되어 일본정부로부터 초토화되어 갔다.
1921년 5월, 조선호텔에서의 만남은 분명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건이 아직도 진행되어 가는 도중 공식석상에서 마주친 운명의 자리였다. 간도교회의 참혹상을 교회나 일본정부가 전혀 알지 못했다는 변명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의 간도 독립군 토벌은 비인간적인 잔학상으로 인하여 국제 여론으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토벌 행위는 일회성 만행이 아니라 반년 이상 진행된 사건이기에 더욱 그렇다. 민 대주교 역시 그곳의 사목 담당자들로부터 시시때때로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공식석상에서 만나 위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면, 일본은 간도교회를 빙자로 교회에 노골적인 압력을 들어낸 것이고, 민 대주교는 다가올 순교를 예측하면서도 한국인의 인권을 끝까지 옹호하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⑫ 역사의 퍼즐 조각은 완전히 보존되어 가는가?
답]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역사 퍼즐 조각들은 권력자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권력자란 역사속에 일본 정부나 공산당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교회사라면 교회기관의 문서 검열 역시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귀중한 역사 퍼즐 조각들이 묻혀지거나 버려졌다는 사실이다. 최근 새로운 조명을 받는 분도통사는 많은 사료들이 100년 동안 독일 수도원 창고에 방치된 덕분에 오늘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물론 그곳의 역사퍼즐 조각들 역시 교회의 문서 검열을 거친 것들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사료와 관련된 사사로운 편지들의 발견을 통해 그 사료들의 의미를 깊이 보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도교회나 북한교회에 대한 역사는 애써 편집한 분도통사나 원자료의 과감한 공개로 역사 재구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교회사는 역사신학의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신학을 버리고 역사철학에만 머물고 싶어 한다. 즉 인간적인 면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의민단 사건’ 끝머리의 ‘자유시 사건’을 통하여 공산당이 처음으로 한국교회사 무대에 등장한다. 공산당은 북쪽, 즉 간도에서 발생하여 점차 남쪽으로 번져갔다. 공산당은 일본을 대신하여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지독한 반공정신(反共精神)이 재화(災禍)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우호적이었다면 공산당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공산당은 소득과 분배 법칙을 빙자로 하여 인간을 신격화하려고 시도한 무리들이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역사 신학을 거부하고 철학에만 머물고자 했다. 결과는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처음부터 교회가 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머물고 간 자리는 메꿀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다. 한국전쟁을 통하여 많은 순교자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역사 신학의 핵심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꼭 기억하여야 한다. ‘자유시 사건’의 계기로 이념 투쟁이 발생한 이후 한국전쟁 중 옥사덕(청천강 상류)의 사건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성체성사, 즉 미사를 지능적으로 방해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옥사덕 수용소’에 밀가루와 포도주 반입을 철두철미하게 봉쇄하고자 했다. 한스(공산당)의 이러한 작전은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철두철미한 봉쇄작전에도 불구하고 밀과 포도주는 옥사덕의 사제들에게 계속 공급될 수 있었다. 밀은 수용소 농장용 옥수수 씨앗에 묻혀 들어왔고 포도주는 산속의 머루를 통하여 공급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옥수수 밭에서 밀 이삭을 발견한 공산당은 사제들과 밀대를 놓고 숨바꼭질 놀이를 즐긴다. 반드시 밀대를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한 밤중 별과 풀벌레 사이에서 밀대를 지키는 사제는 자연을 벗 삼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성체성사 신비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독일 사제들은 훗날 옥사덕을 기억하며 ‘은총의 시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스(공산당)들은 밀대 감시와 함께 육체적인 고통을 가중시켜 갔다. 철두철미한 방관자세로 일관한 수용소 감시는 감기, 몸살, 기침, 소화불량, 파상풍, 동상, 즉 기초적인 약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병고였지만, 수용자들을 끝내 순교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동료들의 반, 즉 입소자 50명 중 20여 명을 하느님께 떠나보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성체성사 신비 안에 머물 수 있었다. 철두철미하게 수수방관으로 일관한 한스(공산당)의 태도는 현대인들에게 도시인의 사막화, 즉 수많은 사람들 안에 외톨리로 남겨지는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보인다. 이것이 바로 역사안에 하느님의 개입을 확인하는 가톨릭의 역사 신학관이다.
⑬ 의민단에서 다물왕국이란 무엇인가
답] 간도 전체를 소개 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의민단에서 상징적으로 소개를 한바 있다.[130쪽] 의민단 조직에서 1대대는 송화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지역으로, 하얼빈에서 동강에 이르는 지역이다. 하얼빈, 빈현, 방정, 의란, 가목사, 부금, 동강이다. 2대대는 하얼빈에서 수분하까지이다. 하얼빈, 아성, 상지, 해림, 목단강, 목릉, 수분하에 이른다. 3대대는 교하에서 훈춘까지이다. 교하, 돈화, 안도, 연길, 훈춘이다. 간도 전체 지도를 펼쳐 놓고 지금까지 소개된 1대대, 2대대, 3대대를 열거해 보면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석삼(三)의 글자 형태로 표현된다. 이제 4대대가 이들의 중심을 가로 지르면서 위에서 아래로 곧게 이어지고 있다. 하얼빈에서 돈화에 이르는 지역이다. 1)하얼빈, 수하, 이춘, 학강, 가목사. 2)칠대하, 계서, 목릉. 3)목단강, 돈화이다. 이들을 순서대로 연결시키고 나면 의민단의 조직 편성은 임금왕(王)자를 완성시킨다. 왕(王)자의 중심 자리는 목릉이다. 목릉, 그곳에 의민단 임시 본부가 설치된다. 목릉은 풍수 지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안중근 가족 피난처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의민단 조직과 임금 왕(王)과의 연결은 작가의 의도적 작품중에 하나이다. 실재적(實在的)으로 의민단 조직은 백두산에서 하얼빈까지, 그리고 하얼빈에서 가목사를 거처 동강에 이르기까지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판공이라는 교회의 특수 전통(봄과 가을에는 반드시 전례에 참석하여야 함)을 통하여 전국의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시(戰時) 중에는 어떤 방법으로 빠르게 통신 교환이 이뤄 졌는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최신 통신 체계를 운영하듯 분명하고 신속하게 전시(戰時)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⑭ 최문식 신부가 간도에 남긴 역사적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까?
답]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 번째 강도영처럼 교회의 일관된 태도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간도의 실세는 중국공산당이다. 그런 이유등으로 여행의 길목에 있는 성당들의 모습을 세심하게 살펴 봄으로써 간접적으로 최문식 신부, 또는 그의 후배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떠나자.
장춘 - 연길은 간도를 횡단하는 477Km의 긴 여행 길이다. 간도는 끝는 지평선이었다. 그런데 이 번 길만은 다르다. 왜냐하면 이곳 간도 탐방의 길은 험준한 협곡이 제법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알프스 산맥만큼 험하다.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은‘구’가 많다. ‘구’란 강변의 모퉁이를 의미한다. 이도구는 두 번째 강변 모퉁이다. 삼도구는 세번째다......., 팔도구는 여덜번째 강변 모퉁이라는 뜻이다. 골자기를 따라 굽이굽이 도는 백두산 물줄기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비옥한 옥토를 바로 그곳, 모퉁이에 내려 놓는다. 그래서 모퉁이, 즉 강물의 토사가 모이는‘구’는 늘 기름진 옥토로 풍요롭다. 사람들은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 시켜 거대한 간도를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의 개척 정신이 없었다면 간도는 아직도 원시림속에 멈춰 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나고 있었다. 말씀은 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왔다.
간도 강물의 시원(始原)은 당연코 백두산이다. 백두산 물줄기는 길림을 훨씬 지나 하얼빈까지 뻗어 갔다. 그뿐이랴. 백두산 물줄기는 분명 하나였지만, 혜란강,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등으로 불리워 지면서 7,000Km이상 긴 여행을 마치고 동해로 흘러 들어 간다.
순례의 여정은 강변의 모퉁이를 절묘하게 이어가는 기찻길을 따라 갈 것이다. 길림 - 신참 - 교화 - 돈화 - 안도현[명월구] - 연길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 외 연길에서 이어지는 도문 - 용정 - 팔도구등은 백두산 아랫 마을로써 팔도구를 중심으로 공소들이 성장하여 본당이 된 곳들이다. 여정속에 처음으로 만나는 성당은 신참이었다.
신참 본당은 신자 90명과 반경 100Km내 250 - 300명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었다. 신참 본당은 1946년 5월 25일을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본당 신부였던 세르바시오 신부가 순교한 날이기 때문이다. 본당 신부의 순교와 함께 신참 본당 역시 소멸하고 말았다.
신참 본당은 우리에게 사진 두장을 전해주고 있었다. 사진 하나는 1946년, 본당의 모습이다. 또 다른 장면은 순교하기 10 년 전 본당 신부[세르바시오]와 교리교사들이다(1937년). 한복으로 단아하게 차려 입은 교리교사들의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다. 한국의 보통 본당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참 본당의 구성원을 보면 한.중.일이 적당한 비율로 섞여 있는 전형적인 국제적 본당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활발한 민족은 당연코 한국인이었다. 팔도구 본당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 신참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당시 신참 본당은 연길지목구 소속 본당이었다. 연길 지목구(1929년)는 원산대목구(1920년)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 뿌리를 찾아보면 신참은 분명 한국교회안에 있었다. 사진속의 주일학교 교사들의 모습은 신참 본당의 뿌리를 잘 들어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순례하는 신참 본당은 한국교회안의 한 부분이었다.
두 번째 만나는 본당은 돈화이다. 돈화 본당의 역사는 1900년경 중국인 대부호가 성당 부지를 기증하고 자금을 지원하면서 시작되었다. 수 백 명의 예비신자가 모여들 정도로 급성장 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자 본당 신부가 본국[프랑스]으로 송환되고, 본당의 전 재산을 현지 중국인 관리인에게 맡기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교구청[북만주대목구]의 성당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현지 관리인이 돈화 본당의 모든 재산을 사유화 하고 만 것이다. 관리인은 신자들을 모두 쫓아 버리고, 출입 마져 막아버렸다. 교구청에서 새로운 본당 신부가 파견되었으나, 관리인은 이 일 마져 거부하였다. 1920년, 돈화 본당은 북만주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 소속 본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화본당은 여전히 교회로부터 방치되고 있었다. 1922년 돈화시는 마적대의 습격으로 초토화되어 대혼란속에 빠져든다. 마적들은 돈화본당을 습격하여 교회재산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적들은 성당에서 탈취한 제의를 입고 시내를 활보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마적들은 한참의 소동 후 원산대목구 소속 신부들에게 제의를 돌려주었다. 원산대목구는 돈화 본당의 모든 재산을 회수하였다. 흐트러진 신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겨우 세 명을 찾는데 성공했다. 만주대목구처럼 전교회장과 관리인을 채용하였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신자들은 마적대를 피해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만들어 가며 살고 있었다. 훗날 본당 신부는 이렇게 독특하게 형성된 공소를 찾는데 총력을 기우리게 된다. 돈화본당의 급성장은 돈화시가 군사 도시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돈화 본당의 성장에는 현지인의 적극적인 협조가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추마리아 동정녀는 최초의 중국인 수녀가 될 뻔 했다. 수녀원에서는 그녀에게 한국어 습득을 권장하였다. 또 다른 청년교사 장토마스의 역할도 대단했다. 이 둘은 돈화 본당의 기둥이었다. 역사속에 뭍혀버린 이들은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날, 꼭 기억될 인물들이었다.
돈화본당은 발해의 역사가 시작되는 성지이기도 하다. ...., 698년 대진국(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이곳에 첫 도읍지로 삼았다. 동모산이라 하여 지금의 성산자산성이다. 돈화시 현유향 성산촌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산이 바로 옛 동모산이며 대진국의 첫 도읍지다. .... 지금 현재 동모산은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 있다. 주인은 마음대로 입장료를 설정해 놓고 받고 있다. 입장료는 50위엔 이란다. 말도 안되는 짓거리다..... 허참...!!!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한 후 평지에 성을 쌓고 첫 도읍지로 정했다는 곳 중의 하나인 중국 지린성 둔화시 오동성. 성터는 흔적이 없고 지린성 정부가 세운 표지석만 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다. ]
다음으로 만나는 성당은 용정성당이다. 용정은 참으로 대단한 곳이다. 이곳과 인연이 깊은‘가톨릭 少年’잡지를 기억하고자 한다. [가톨릭 소년] 잡지는 연길교구에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3년동안 간행한 아동용 잡지였다. 연길교구는 [탈시시오연합회보]를 개편하여 가톨릭 소년을 창간하게 된다. 탈시시오회는 1905년 로마에서 에질리오 왈젤리라는 청년신부가 주도하여 조직한 소년 단체로 성체공경과 예전운동, 초대교회의 고고적 성물연구, 덕행수행을 목적으로 하고 3.4세기 로마의 소년 순교자로 알려진 탈시시오[Tharsicius]를 주보 성인으로 삼고 있었다. 이 성인은 복사와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20년 -30년,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이를 대응하는 면도 고려되었다.
가톨릭 소년 잡지는 탈시시오 회보가 발행되던 滿洲國 間島省 延吉市 용정천주당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가톨릭 소년 잡지의 이름은 警鐘으로 종교적 색채를 없앨 의도 였으나, 그 반대로 명백히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인쇄는 서울의 彰文社가 맡았다. 창간호의 축사는 서울의 이병기, 평야의 강안숙, 대구의 최정복, 덕원의 김현묵, 김성환등이 글을 주었고, 표지는 장발이 그려냈다. 서울의 창문사는 시인 이상[李箱 -본명 金海卿]씨와 화가 구본웅[具本雄]의 참여로 단순한 인쇄소의 차원을 넘어 섰다. 가톨릭 소년 잡지에 참가한 문인들을 보면, 윤극영, 강소천, 김영일, 안수길, 박영종[木月]등등이 있었다. 윤동주도 여러 번 참여 하였으며, 편집장이던 이상씨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가톨릭 소년 잡지는 간도의 끝자락 흑룡강에서 제주도에 이르기 까지 퍼져 나갔다.
안도현은 팔도구의 35번째 공소였다. 안도현은 옹성시, 옹성라자. 옹성랍자. 명월구, 밍워꺼우 등의 이름으로 지명이 소개되고 있다.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베네딕도 회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옹성라자를 팔도구 본당의 35번째 공소로 등재했다. 그는 안도현에 최초로 학교를 열었다.
안도현은 50Km 이내 자연 마을이 전혀 없었다. 들어오는 평지 입구는 수렁과 늪으로 말 또는 마차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큰 산이 외부로 부터의 모든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이런 천연적인 요새로 말미암아 안도현은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되기도 하였다.[義民團 - 본부 및 훈련장]
독일의 아도 신부는 [옹성라자에서의 하루]라는 글을 남겨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두 산악 계곡이 갈라지는 곳, 모든 것을 압도하는 크고 높은 암벽아래 작은 북간도 장터 마을 옹성라자가 있다. 추운 겨울 날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길을 걸어 성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암벽 오른쪽 모서리에 모여 있는 초가지붕의 작은 초가집들은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본당은 초라산 기슭에 자리한 한국인 가옥 한가운데 있었다. 초라하게 보이는 경당에 잠시 들은 후, 몸을 녹이기 위해 벽돌로 소박하게 지은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되고 있음에도 벽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있었고 창문은 꽁꽁 얼어있었다. 돈화에서는 영하40도까지 내려간 적도 여러번 있었다. [MB 1931. 262]
라타 헤스 수녀는 안도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 한국인이 명월구라고 부르는 마을은 연길과 돈화 사이 큰 철로 변에 있다. 이 철로는 한국의 청진을 출발하여 연길과 길림을 거처 만주국의 수도인 장춘까지 이어진다. 이 마을은 산맥으로 둘러 쌓여 있다......, 명월구 계곡은 도보로 여섯시간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폭은 1.5 - 2Km이다. 계곡의 끝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울창한 원시림과 늪지대이다. 곰같은 야생 동물의 본거지다. 돈화 본당까지는 70Km이고 신설된 신참본당은 130Km 떨어져 있다.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큰 도시 단동이 있지만, 원시림으로 뒤덮인 산들로 분리되어 있다.
3. 결론
이제 마무리 해보자. 역사적인 현장, 의민단의 본부에 들어서면서 받는 느낌은 [의]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다. [불의]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삶, 그것이 의로운 삶의 모습, 즉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1946년 신참 본당 신부의 순교, 그 원인은 1936년, 용정에서 발행된 [가톨릭 소년] 잡지 발행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교회는 지독한 사회 혼란속에서 청소년을 보호할 목적으로 [가톨릭 소년]을 창간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가톨릭 소년]은 처음부터 경종(警鐘)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골적인 표현으로 사회로부터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므로 [가톨릭 소년]으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이란 짧은 삶으로 [가톨릭 소년] 잡지는 수명을 다한다. 당시의 권력자, 일본으로부터 강제로 폐간되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물론 1920년대 [의민단]이란 이름으로 가톨릭 신자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있었다. 봉오동, 그리고 청산리 전투, 그것은 불의에 항거한 용감한 평신도들의 작품이었다. 8,000명의 신자를 형성하고 있었던 간도 교회는 1,500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무려 20%에 가까운 희생이었다. 일본은 간도에 이어 한반도에서의 가톨릭교회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1921년 5월 1일, 원산과 간도를 떠 맡을 주교가 탄생하는 날, 조선호텔에서 일본의 사이토 총독은 이미 간도 천주교회 평신도 대 학살이후 한반도 내 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대주교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기에 이른다[MB 1921/1922.11]. 이때부터 일본은 천주교회를 가장 두려운 적으로 여겼다. [가톨릭 소년] 잡지의 폐간은 일본의 야망을 들어 낸 구체적인 증거물이었다. 일본에 이어 또 다른 권력자로 등장하는 공산당은 일본보다 더 잔악한 모습으로 간도천주교회를 탄압하기에 이른다. 간도내에서 끝임없이 일어났던 폭동과 폭력 행위는 일본 권력에 대한 도발로 보이지만, 깊은 속셈은 권력을 잡기 위한 공산당의 수단과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개하는 비윤리적 행위는 일본 정부가 아닌 양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망이후 공산당의 첫 번째 표적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그리고 수도자들이었다. 신참 본당 신부는 그들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의민단(義民團), 그것은 의(義)로운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가톨릭 신앙인은 의로움의 원천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
산다는 그것,
적당한 삶이 결코 아니다.
신앙 때문에 그대의 벗으로 부터
그대의 목숨을 담보로 설정하기 원한다면
지체함이 없이 그대는
내어 주어야 한다.
가톨릭인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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