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한국사랑

백두산 천지 여행(광복 70주년에 붙여)

泉玟 김동석 2015. 10. 3. 00:31

백두산 천지 여행 (광복 70주년에 붙여)

 

 

광복 70주년 며칠 앞둔 팔월9,10일 양이틀

개미실 산우 34인은 118차 산행은 백두산 서파북파를

장춘에서 돈화 발해광장 지나 도백하로

난 천진에서 연길를 도문 용정 일송정과 용정우물을 지나

열차로 이도백화 모여 모였다

첫날 서파입구에서 상봉하여 천지를 보던날

모두들 북한땅으로 백두산엘 오면 좋을것을 이구동성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애국가를 부르며 천지를 관람하고 보던 첫날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과 어우러진 천지에서

용천하는 대한민국이 보이고 북한이 보였다

금강대협곡을 보고 하루를 마감한 산우들 들떠서 난리다

다음날 북파입구에서 다시만나 정상에서

비구름이 너무 많아 실망하던 순간 천문봉 2640미터

서서히 걷히는 구름사이로 열린 천지 용천이라

감탄과 함성이 쏟아져 천지가 들썩였다

와~`아~~~~보인다 천지가 와~~우~~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조상님도 개벽하였다

3대가 착한일 해야 본다던 천지를 이틀동안 보았으니

개벽이고 조상님의 은덕에 자랑도 함께 함이다 ​

북파에서는 이쪽저쪽 보는곳마다 형세가 다르고

자연의 오묘함이 다른것은 우리영지가 틀림없었고

멀리 북한에서 내려오는 하얀 천단에 올릴 시수길

장백폭포로 소천지 녹연담을 내려오면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기상이 다시오고

해동성국 발해의 대조영 223년 세상이 다시오는듯한 기분이다

압록강과 요하강의 요동반도를 호령하던 고구려

송하강 해란강 흑룡강 오수리강 두만강의 기상

간도를 주름잡던 해동성국 발해가 용트림한다

21세기 일제치하 해방70주년에 고한다

만주벌판에서 말다리던 우리후예들의 기백과

일송성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바치고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 깊이새겨 두었네

말달리고 활을쏘던 선구자 이억만리에서 맹세했네

조국을 찾게노라 거친꿈이 깊은 선구자

독립투사들의 백은평 전투에 봉오동 전투에 힙입어

청산리대첩을 이끈 홍범도 김좌진장군등 독립투사들의

혼이 깃든 돈화 연길 화룡 용정 왕청 훈춘 도문이여

발해유적지도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도 세운곳이여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말그대로 조선 고구려요 발해다

우리 조선인이여 원하건데 중국인이라지만 

조선의 백의민족의 전통의 얼은 잊지 마시라

윤동주시인도 심련수 시인도 송몽규시인의 숨결이 들리고

7천만 동포여 7천만 동포여 일어나라 이제는

한반도가 남북한 분단국에 광복 70주년이니

어찌해보기 어렵다만은 통일이 되기전 우리역사 바로알아

익히고 가르치고 넓히고 알려서 통일되는날

백두산 정계비의 서위 압록강 동위 토문강 내용도 밝혀보세

장백폭포로 이도백하가 토문강 송화강 오수리로 흘러 동해로

고구려땅 발해땅 남북국시대로 다시배우고

쏘련 녹둔도 블라디보스토크 아주 그위까지도 발해땅

간도협약은 무효요 대마도도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곳이여 

나라현도 우리땅이었노라

다함께 외치면서 역사 바로알기 시작하세

우리 어른들도 어린새싹들도 역사공부다시하여 

훗날 우리 조상들이 침략은 받았으나 흥망성세가 있었다구

하나도 빼지말고 설움도 영광도 함께 하세​

오~~우~~~대한민국이여

남북이 통일되고 하나되어 구국강성 만드세

중국 백두산 및 길림성 여행기

여행일자 : 2015년 8월6일~8월 12일

장소 : 7일 도문(북한국경) 개산돈진 삼합 (회령국경) 용정(우물 윤동주생가 용정중학교 윤동주기념관 이상설역사솬) 일송정

         8일 서파 백두산 및 ​금강협곡

​         9일 북파 백두산 및 장백폭포 소천지 녹연담

       10일 ​돈화 육정산 문화 여행구의 발해박물관 유적지 청조사 문화원구 정각사와 대형 금정대불상 그리고 옥불원의 석가모니와불상 외 발해관련 고분

       11일 도문 훈춘 방천(러시아 북한 중국 3개국 국경과 북한 러시아 다리 와 동해 장고봉(張鼓峰 1838) 사건 기념관과 유원지 오대징(吳大徵 1835~1902) 국경확인및 표지 세움으로 러시아와 북한간의 국경 분할역할근거가 됨

       12일 연길 박물관 모아산 민속촌 및 기념탑 연길 시장

               밤6시35분 비행기였으나 9시10분 비행기로 늦어지고 천진도착 11시10분에 되었다 11시 30분에 빈하이신취 폭팔사고가 나기 시작함​

        

길림성은 성시가 장춘이다 그리고 길림시가 따로 있다 대한민국 북쪽에 있으며 중국의 영토로 현재는 되어 있다 러시아 국경이 있는곳이기도 하며 우리 민족들이 제일 많이 사는곳이기도 하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기도 한곳이다

물론 길림성에는 장춘시 길림시 안도현 돈화 화룡 용정 도문 훈춘 연길 왕청등 많이 들어본곳이 있는곳이며 장백현 통화시 등도 있으며 특히 장백산맥이 있고 중국에서 장백산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명명하는 곳이 있다

우리의 영지 천지로 애국가에도 나오는 동해물과 백두산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곳이다

이번 백두산 여행을 목적으로 여행을 하면서 느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개미실 산우회가 백두산을 오게되는 계획 작년부터 세워졌고 나또한 이기회에 가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백두산에서 합류하는 여행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조금씩 모으기는 했어도 막상 검색한 내용들이 실감이 오지 않었다

그냥 막연하게 독립운동한던곳이요 또 우리민족이 이주하여 사는곳이요 또 그들이 요즘은 한국에 많이 산다는것과 한국기업이 여러곳에 있다보니 이주하여 한국기업과 같이 공존하면서 자영업도 하고 제조업도 하고 또 직원으로 함께 일도 하면서 일하는 사례가 많아 이제 이백만 우리동포들은 거의 흩어져 살고 있다고 들었다

2015년 8월6일 전날 한국에서 천진으로 와서 다음날이라그런지 여독이 남아있는상태에서 우후3시25분 에어 차이나 비행기​ 정시에 이륙하여 정상시간에 연길에 도착하였다 택시를 타고 사전에 예약한 희옥민박집으로 갔다 비행기에 내려서 보니 앞에는 한글 뒤에는 중국글자로된 간판들이 여기가 조선족 자치주라는 것을 실감할수가 있었다 중국은 이것을 인정하고 먼저 그민족의 글을 우선해준것이다 이러한것이 아마 우리동포들이 중국인민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고 중국이 크고 대한민국이 작어서 일것이다

중국말은 못해도 대충 여기가 어디라는 것은 간판에 먼저 한글이고 뒤에 중국글자다 그러니 어딜가든 큰 문제가 없기는 한데 택시를 타보니 중국말로만 한다

그만큼 연길도 한족이 80%이상 산다고 하니 자치구라는 표현이 무색하여 졌다

길림성은 대부분 이정표가 한글이 먼저 있는곳이 많다

​택시에서 희옥민박집입구에 내리니 윤광희사장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사람이 좋아 보였다 민박집을 택할때 말소리나 카페나 블로그를 많이 들어가보고 평을 보고 선정하는데 나도 같은 방법으로 하였다

사람은 생각과 고마움을 느끼는것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장을 풀고 연길시내나 볼겸 나와서 저녁을 먹었다 분주하고 편안해보였다 간판은 보면볼수록 재미있는 한글이 많었다 중국글자 그대로 직역하였으니 그럴수밖에 없다 우리와 문장을 쓰는게 다르니 더욱 그렇다

북한도 우리글과 다른것이 많다 특히 ㅇ ㄹ 등의 두음법칙에서 대부분 ㅇ을 쓰지않고 ㄹ을 그대로 쓴다 다음에 별도로 이부분을 정리하도록 하고 여행기를 써보자

8월7일은 차량을 한대 빌려서 도문으로 항했다 우리지도상 꼭지점에 있는곳이다 여핼객들이 많이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과 교역하는 다리가 있다 양쪽에 국경을 통과하는 통행관문이 있는곳으로 중국과 북한으로 오고가는 유일한 통로중에 하나다 아마 내가본 두번째 다리인듯하다 압록강 단동에서 보던 철길과 도로를 보고 처음 보는것이다 저건너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사진이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산에는 나무가 없이 푸른 동산이다 그리고 논밭이 보이고 허름한 건물들이 보였다 나는 배를 탈수있다고 하여 두만강에서 배를 타보았다 200미터를 오르다거 내려오면서 북한초소도 보았다 어찌 되었든 배타는데도 돈이다

다시 돌아 나오는데 소학교어린이들 동북삼성의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고 최종발표가 팔월말에 있다고 되어 있었다​

내용들이 정말 새싹들이 한글로 쓴것이라 사진으로도 남겨보았다 점점 우리말이 중국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글로 글짓기를 하고 있다는것이 뿌듯한기분이 들었다

북한으로 들어가려면 관문이 있다 ​그관문에 다리 50여미터가는것과 관문 옥상에올라가는것을 입장료를 받고 들여보내고 있다 나또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사진도 한장찍고 또 옥상에 올라가 북한땅도 바라보고 사진도 남겼다 나무가 없다 정말 땔감으로 베어서 썻을까 어찌되었든 나무가 없이 여름이라 파랗기는 해도 나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북한땅도 비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한보다 더 넓은땅에 인구가 절반이라면 식량은 자급자족할수있는 땅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국경사이로 도로를 2차선으로 만들어 놓아 개산돈과 삼합으로 가는내내 북한 국경이었다 강이쪽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으니 국경이라기에는 담장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었다

길을 가면서 참외도 사고 마을 구멍가게도 들어가 보았다

막걸리를 해서 파시고 있었다 커다란 사각함에 절반이 들어 있었다 한대접을 주시어 마셔보았다 좀 달고 연하고 부드러운 맛을 내는 막걸리를 패트병에 한병 주시어 점심에 먹기도 하였다

삼합에 산정상에 정자가 있었다 오르기전에 백숙을 시켜놓고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에서 바라본 국경넘어 회령이었다 먼곳은 무산이었다 회려을 지척에서 보았다 도시는 읍정도 크기였다 내가 아는 지도상 회령은 큰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마을이 부촌이라는 느낌이 들정도로 뜰도 산도 적당히 있는곳으로 열차가 지나가는모습도 보였다

내려와 삼게탕을 먹으면서 우리맛과는 달랐으나 시골에서 하던 맛이고 또 우리동포들이 만든것이라 푸짐하게 먹으며 막걸리도 한잔 겹들였다

용정으로 넘어와서 첫번째 길목에 윤동주 생가가 있었다 생가는 명동학교와 생가 그리고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장료를 받고 또 대표들에게 방문 싸인과 찬조를 받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책 두권을 사가지고 왔다 심련수시집과 청년문사 송몽규를 사오면서 설명해주신분의 자필싸인을 받아오지 않었다 이전부터 두사람은 윤동주못지않은 시인이라는것을 잘알기에 사온것이다

용정 우물을 아주 잠깐 차에서 내려 보았다 주변에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하투놀이도 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일송정에 오르니 일송정비가 있었으며 정자가 있었다 사방이 멀리 보이는곳이다 연길도 보이고 화룡도 보이고 안도현도 보이고 도문도 멀리 산이 보였다

정말 뜰이 넓고 비옥한곳이라는 생각이 한눈에 보였다 말다리던 선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한국에서 여행객들이 많이도 와서 사진도 찍고 대화도 하는모습이 보였다 매이 이렇게 온다고 한다

생가에서도 보고 여기서도 보고 또 용정중학교에서도 보았다 함께 설명을 듣고 나와보니 김두관 김포시 새정치연합위원장도 오셔서 관광을 하고 있어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많이 오는데 무엇을 느끼고 가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가 우리땅인데 하는 생각은 거의 다하고 가실거다

용정중학교는 윤동주기념관이라기보다는 역사 변천사 용정이나 주변에 계시던 항일운동가가 학교를 세우고 또 우리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열거해놓은 곳이라는것이 눈에 보였다 김좌진 홍범도장군등도 안중근의사도 이준열사도 또 이상설선생도 잘 설명을 해주시었다 옆에는 이상설 역사기록관이 따로 있었는데 여기는 설명을 해주지 않었다 왜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는 1917년생이고 이상설선생은 1917년에 돌아가셨다 용정에 서전서숙이라는 민간학교를 세우신분으로 윤동주 아버님이나 외할버지세대에 사신분으로 오히려 명동학교등보다도 더 오래전 학교를 세우신분이고 이준열사와 함께 세분이 헤이그에 대표로 가셨던 애국지사였다 그런데 설명을 안하냐고 물으니 아무 말이 없었다 방문객들은 더 자세하게 보면서 이상설선생에 대해서 보는듯하였다

여기서 나는 두권의 책을 구입했다 윤동주 시집과 발해역사를 한글판으로 사면서 파시는분의 싸인과 용정학교 직인도 받었다

느낌이 많었지만 내일 백두산을 가기위해서 4시30분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얼도바이허)를 출발하였다 개미실 산우들과 연락이 안되어 답답하였지만 저녁7시에 도착하여 민박집으로 숙소를 정하여 하루를 보내고 아침에 일찍이 서파를 오르기위해 입구에 가서 개미실 산우들을 기다렸다 40분 기다리는사이에 맑은 하늘이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것을 보고 백두산 천지 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미실 산우 34명을 이렇게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인파가 없던이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많이 모였다 40%는 한국인이고 중국인이 60%로 더 많다 모두들 이 인원이 금강산가듯 북한으로 올라가면 얼머너 좋을까 하는 생각을 이구동성 이야기하며 표를 들고 들어가며 지문인식을 하고 들어갔다 내일도 이지문으로 확인한다고 한다

버스는 정상 못미처 주차장에 서고 우리는 내리면서 가이드의 이야기에 눈길이 쏠렸다 저기 피레침이 보이니 천지를 볼수 잇다고 말이다

1300여개 이상의 계단을 올라 정상에서 내려다본 천지는 사람이 많어서 비비적거리고 간신히 보기 바쁘고 사진기를 들이대고 찍는것이 온천지의 사람들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천지를 이쪽 저쩍 다니며 보았다 북한땅이라는 비석도 중국땅이라는 비석도 보이고 핸폰으로 천진 전체를 사진으로 담으려니 사람들이 많어서 할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서서 찍어야하는데 할수가 없었다

통쾌하고 후련한 천지를 보고 또 구름이 걷히고 선명하게 보이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수없이 아름다웠다 더욱이 개미실 산우들과 함께하는 천지의 모습을 보는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였다

그러면서 백두산 정계비가 생각이 나고 또 김일성이 이쪽을 중국에다 넘기고 하였다는 생각이 들고 북한으로 오면 얼머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검색하여 함께 보자

청대

오라촐관 목극등은 국경을 심사하여 와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요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분수령으로 돌에 새긴다는 내용으로 강희51년 5월15일​로

필점식 소이관 이거와 조선군관 이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양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이렇게 쓴것이 없어진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내용은 동쪽의 토문강이다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다 이런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서로 땅을 가지고 빅딜을 한것이 들어나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간도성이 나온다 간도는 다는 아니지만 우리땅이 라고 말하고 싶다 강한 나라가 되어야하고 통일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우리땅은 빼앗겨 버린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도성만 보면 안된다 러시아가 중국과 서로 땅을 나누어가진 정황이 해방후20년사이에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땅이 러시아 위에까지 있었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것이다

러시아가 대련까지 내려오고 일본과 러일전쟁에서 패하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나가 패하고 만주국이 만들어지고 하면서 철도권으로 만주협약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국경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꼴이 된것이다 나라가 강해야한다는것 우리는 실감하며 더 강한나라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강성 국가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돈화나 훙춘 연길을 돌면서 발해사에 대한 역사유물을 발굴하는 중국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중국 공정이 이런것이구나라는것을 느낌을 받었다

위지도가 아니라도 북간도 서간도의 지도를 보면 백두산 정계비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아닐수 없다 아래지도를 보면 바로 이해가 간다

 


 

위의 두지도가 우리땅이라는 명백한 지도라고 보면 된다

​우리민족이 살었던곳이며 또 한인학교가 있던 울라지보스또크에는 심련수시인 5형제가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란곡리 399번지에서 태어나 이주하여 학교에 다니다가 러시아인들의 학대로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공제촌으로 내려와 살다가 가족이 용정으로 내려와 사는관계로 용정에서 자라고 공부도 하고 또 영안현에서 교감생활도 하다가 왕청현에서 살해된 심련수시인의 일생을 보더라도 우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전에는 우리민족이 살던곳이고 학교가 세워지고 생활의 터전이 되던곳이 우리땅이라고 할수밖에 없는곳들이다 일제의 간도협약이나 러시아의 남침으로 인한 러일전쟁등이 현재의 지도를 만들어 놓은 최악의 영토가 되었슴을 우리는 알어야할것이다

삶의 터전이고 또 이순신장군이 녹둔도(두만강에 있는 여의도세배의 섬)에서 진을 치고 있던곳이 러시아땅이 된것을 우리는 알어야한다

여행기를 쓰면서 느낀 이야기를 쓰다보니 안타까워 다른곳으로 흘렀다 며칠 여행하면서 더 이야기가 나오것으로 본다

 

​다시 돌아가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는 꼭 우리 민족이 알어두어야할 사항임을 인지하고 서파에서 내려오면서 금강대협곡입구에서 점심을 비빔밥으로 먹고 협곡의 자연의 조화를 보며 다시한번 놀랄수밖에 없었다

삐죽삐죽하게 남은 바위가 여러가지 모양을 하고 협곡에 남아서 깊은 곳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형상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꼈다

많은 인파속에서 나는 개미실 산우들과 함께 ​전진안마를 받고 닭백숙을 맛있게 얻어먹고 나의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늦었지만 천지의 환희가 가시질 않었다

이도백하 민박집 주인 길철호씨와 다음날 북파를 가기위하여 잠깐 이야가를하고 새벽 다섯시에 출발을 위하여 잠을 청하고 4시반에 일어나 씻고 가방을 정리한뒤 ​5시에 출발하여 북파입구에 도착하니 접수하는 사람이 많었다

김철호씨가 출입증이 있어 나는 관리자가 들어가는곳으로 들어거 손쉽게 차량표를 구입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개미실 산우들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가이드가 접수하는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0분도 안되는데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김철호민막집 주인이야기가 거의 맞는 말이다 일찍가야한다고 한말이 실감이 났다

김국철 개미실 가이드가 들어오고 또 개미실친구들이 들어와 함께 40인승 버스를 타고 어느정도 오르다가 찝차로 갈아타고 올라갔다

북파정상은 어제 장상보다 높고 중국쪽으로는 제일 높은곳으로 꼬불꼬불 차는 힙있게 올라가는데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기가 짝이 없는곳을 오르고 또 올라서 정상에는 관리하는 휴게소 집이 지어질정도로 넓은 터가 있었고 세곳으로 나누어 볼수있는 곳이었다

정상부터 내려오면서 보았어야하는데 나는 중간에 두군데만 보았기에 아쉬움이 있지만 구름이 자욱하여 천지는 볼수가 없었다

3분이 지났을까 구름이 걷치면서 천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말처럼 산이 가려 보이는곳과 안보이는곳등 부분부분만 천지 보였다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모두들 함성이 쏟아 나왔다 구름이 걷치는 장면과 천지가 햇볕이 드는 장면은 정말 멋지었다 자리를 옴겨 다른쪽을 보는데 멀리 계단이 보인다 저기가 북한에서 내려오는 그야말로 천지 물을 떠볼수있는곳이란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남파에서 오르면 거의 볼수가 있는곳이란다

이렇게 양이틀동안 천지를 볼수있는 행운을 맛보는 것은 천운이라고들 카톡으로 격려를 해주는 친구르이 많었다

한시간정도 정상에서 시간을 보낸듯하다 그사이 우리들은 이슬이를 정상주를 준비한 개미실 친구들이 있어 어제는 못한 몇잔 마시시 더 기분이 좋았다

개미실 산우 친구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이제야 해봅니다

하산을 하여 장백폭포에서 우리를 내려주어 걸어서 장백폭포를 구경하였다

오르곳에 온천이 나와서 옥수수와 겨란삶은것을 사먹기도 하였다 유일하게 천지에서 흐르는 장백폭포를 멀찍이서 감상하고 인증샸도 하고 우리 일행들은 행복감이 넘쳐 흘렀다 잠깐 비가 오는듯하더니 이내 맑어서 더 좋은 관광을 하였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소천지와 녹연담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걷기좋게 길을 만들어 놓아 힘든지도 모르고 자연의 야생화도 구경하며 내려왔다 녹연담에 내려오니 식당이 있었다 모두가 코스처럼 시간이 맞었다

여기서는 돌솥비빕밥이었다 어제보다는 맛이 있었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처음 접수한곳에 도착하니 2시가 안되었다 김철호씨와 김국철씨가 아는사이라 버스를 같이 타고 와서 내가 묵은 숙소에 내려주고 갔다 알어보니 4시반 기차가 있다고 한다

김철호씨는 이도백하에서 한족과 결혼하여 처음엔 집에서 민박집을 하다가 지금은 여관처럼 건물을 임대하여 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안주는것이 흠이기는 해도 집도 깨끗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또 조금 비용을 더주면 서파든 북파는 입장표나 교통편도 또 안내도 버스표도 구입하여 손수 안내를 해주기에 편하고 무리없이 여행할수 있다

물론 언어도 한국어가 어느정도 되기에 더 좋다 한족학교를 다녀서 글자는 모르고 말은 한다고 한다

여행에 불편한것이 하나도 없이 잘 해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

열차표를 구입하고 아무 대책없이 열차를 타고 시간이 갈수록 배가 고팟다

아침밥도 안먹고 산행하고 점심 비빕밥먹고 시간이 6시가 넘으니 정말 배가 고팠다 다른사람이 사와서 먹는것을 보니 더 그랬다 열차에서도 파는것이 있었지만 별로 먹을것이 없어 보여 기다렸다 화룡을 지나 용정에 도착하니 7시가 넘었다 가깝다고 생각하여 나와 기다렸다가 용정에서 너무 많이 기다리기도 하고 또 중간에 어딘가에 서서 갈 생각을 하지 않었다 이열차가 그때서 난 복선이 아니라 단선으로 열차가 지나갈때까지 기다린다는것을 알었다 물론 이도백하에서도 한참을 쉬었다 그때는 느끼지 못하였는데 단선철도로 도문까지 난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놈들이 철도권을 따려고 만주국이라는것과 간도협약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동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하고 동북삼성에 곡창지대에서 농산물을 가져가 전쟁의 군수물자로 이용한것이다

8시가 조금안되어 연길에 도착하여 걸어서 민막집까지 갔다 윤사장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쉽게 찾고 가까운거리라는것을 느꼈다

​나와서 저녁을 먹으려니 이시간은 식당이 없다고 하여 집에서 라면릉 하나끊여주어 먹고 내일 돈화 여행을 하는것으로 하여 차를 한대 불러서 다니기로 하였다

아침 8시반에 돈화로 떠났다 연길에서 서북쪽으로 3시간정도 소요되는곳으로 하늘이 곳곳에 뭉게구름이 떠 있었으며 어느곳은 비가 오는곳도 있었다 내가 가는길에도 터널을 지나니 비가 십분정도 쏟아졌다 소낙비로 굴지성비였다

조금 지나니 언제 비가 왔다는듯 하늘이 맑았고 약간 더위를 느꼈다

먼저 六鼎山문화 여행구를 찾았다 시간이 11시 40분이라 먼저 식사를 하기위해 주변을 돌아보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냉면집이 있었다 이름만 냉면집이지 음식이 다양하였다 모처럼 맛있는 냉면에 입장료도 10원 저렴하게 구입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을 들렸다 깨끗하고 양변기로 되어있어 너무 편하게 뒷일을 볼수잇어 주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고 나와서 동화 육정산 문화여행구를 들러보았다 52만 평방미터 에 핵심지역 10만평방미터에 불교문화원구 발해문화원구 청시조문화원구등 8개 공원조성으로 되어 있어 도보는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는 곳이었다 

청조사발상지 기념관을 보고 금정대불을 보기위하여 불교 예술관과 정각사등 절경내를 올라올라 정상에서 금정대불을 보곡 사방을 둘러 보았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돈화시는 물론 멀리 연길이나 길림 그리고 안도현이 멀리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와 옥불원에 가서 와불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웅장하고 정중하게 누어있는 불상을 볼수잇었다

해동성국 발해유적지를 보앗다 정해공주 묘도 보고 비석도 보았다 여기는 산이름이 달랐다 六頂山 古墓群으로 여러 묘지들이 발견된곳이다 이외에도 나중에 한어책과 번역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니 돈화 길림 연길 화룡 안도 왕청 훈춘 도문 목단강등에서 이러한 유적이 많이 나오고 성터나 고분 생활용기들이 많이 출토 되었다고 읽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발해역사는 중국역사가 된것이다 지도도 제일 흥한시기에는 압록강너머와 그리고 요녕성일부와 흑룡강성 그리고 길림성과 러시아 불라디보스토크보다도 더위까지와 원산까지 그려져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로만 배울게 아니라 남북국시대라 칭해야한다는 유득공의 발해고에 표현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빠른시일내 북한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한다니 그렇고 우리 남한도 남부국시대 223년을 역사에서 가르켜야 할것이다

입구에 있던 발해 유적 박물관을 돌아보니 더 뚜렸한 중국의 역사관이 보이고 이것이 동북공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걱정만하지말고 우리는 우리대로 온국민이 역사인식을 바로 배우고 바로익혀서 혹여 역사를 이야기 할때는 강력하게 주장할수있는 지식을 겸비해야한다는 것이다

발해광장에 가면 넓은곳에 발해의 역대 왕 대보영시조부터 15대왕까지 ​업적비와 모형상을 세웠는데 대단한 발상이고 또 모든이들에게 동북삼성의 땅이 중국역사였다는 이야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역사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다시 정립을 할때가 온듯하다

이렇게 2015년 8월 10일 하루도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돈화를 이렇게 여행하면서 많은것을 느꼈다 역사를 재 정립해야하는 시기인듯하다

연길로 돌아오는길에 저녁을 먹지 않아 피곤도 하고 하여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으며 술한잔도 마시고 피곤하여 전신안마를 받었다 잠이 오는것을 참고 숙소로 왔다 그냥 잠들어 버리면 안될듯하여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내일 여행은 훈춘 방천을 가서 러시아와 북한 국경이 있는 두만강 하류다

사전에 280원을 주니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버스를 타고 도문을 지나 2시간이상을 가니 훈춘입구가 나왔다 검문을 하는데 좀 으시시 했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지역을 들어가면 통행세를 받는데 다른곳은 다 없어졌는데 여기는 검문이라는 핑게로 돈을 받는것 같았다

도문에서 훈춘가는길에도 두만강의 국경 철책선이 보이는것을 보니 이길도 북한과 국경을 따라 가는길이고 멀리 산너머에 김일성 동상이 보였다 기사가 왕자성이라고 하는듯했다

훈춘에서 잠깐 화장실을 드리고 버스는 산길과 평지를 가면서 검문을 하군데 더 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버스가 ​방천입구에 도착하니 두만강이 옆에 있었고 여기는 배를 탈수 있도록 해놓은곳이다 가이드는 방천 국경과 전망대를 보고 1시까지 여기로 오라고 이야기하고 버스를 타고 러시아국경까지 가서 내려서 토비가 있는 국경에 도착하였다

북한과 구경보다도 더 높고 더 강한 철책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뒤에 토(土)비석이 서 있었다

저 근거로 러시아에서 땅을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언덕이라 사방이 잘 보이지 않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용호각에서 내려 가이드로부터 표한장을 받고 전망대를 올라갔다 11층이다 그리고 12층 야외가 보이는곳에서 북한땅도 보고 러시아땅도 보면서 두만강 하구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감호가 새로웠다

북한에서 러시아로 연결되는 다리가 있었고 다리 두번째 난간까지가 러시아라고 한다

멀리 까지 잘 보이지 않아 ​망원경을 빌려서 보았다 20원인데 야진이 200원이었다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고 녹둔도가 보이는곳이다 녹둔도는 우리의 국경임에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고 들었다 이순신장군이 주둔도하고 또 김종서의 4군6진에도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듯하다

그리고 두만강 하류의 물은 바다로 흘러흘러 ​가고 있었다

저너머 북한땅에서는 기차가 지나고 사람들과 인가에서 농사짓는 모습도 보였다 ​

러시아 땅도 멀리서 보니 평온하여 보였다 간도협약이나 남북이 갈라지지않었다면 우리 주장이 어디까지 우리 국경으로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쪽에는 우리민족이 이주하여 많이 살었기에 우리땅이라고 주장하여도 손색이 없는곳으로 2차대전 전에 ​소련이 남침을 하고 중국땅과 조선땅을 점령하고 청나라시절 오대징이 국경표시를 하게하고 일본놈들이 만주철도권을 따기위해 간도협약을 하여 국경을 임의로 만들어 놓은것이 현재의 국경이라는것을 볼때 안타깝끼 그지없다 우리 주장은 하나도 못한꼴이 된것이다

한편 중국은 소련과 1858년 애혼조약(아름다울애 ​琿)에서 소련에 흑룡강성 우수리강북쪽 60만 평방미터를 빼앗기고 1860년 북경조약으로 소련 동해연안과 홋가이도 40만평방미터를 빼앗겼고 우루무치위쪽에 44만평도 그외에도 7만평방미터를 그리고 몽고도 중국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가 소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카다로그에 나와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정말 어떻게 해명을 하고 처신해야할지를 잘 새기고 준비를 해야할것이다

청나라말에 1886년에 오대징으로 하여금 국경을 재확인하고 여러가지 글자비를 세워서 국경을 정하게 하여 훈춘에서 방천가는길 오대징 동상이 아주 크게세워진 동상이 있다

망원경을 빌려서 북한땅 멀리도 러시아도 동해안도 보고 점심을 두만강식당에서 먹고는 오늘길에 장고봉(張鼓峰)사건 기념관으로 1938년 일본과 항일전쟁사건의 정후와 유물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들리고 사구환락곡(沙丘歡樂谷)을 들려서 오대징(吳大徵)석조(石雕 독수리조)석상을 들러보고 훈춘을 지나 도문으로하여 연길로 돌아오니 저녁 6시경이다 12시간의여행으로 중국어는 잘안되지만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버스한대인원은 견학겸 여행을 한것이다

연길 순두부 전문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한참 철인 야생송이집에 산에서 내려온 송이들이 이집저집에서 포장을 하고 있었다

좀 사오고 싶었지만 아직여행도 하루 남아있고 하여 별생각없이지나졌는데 나중에서 생각이 간절하였다

오늘 마지막밤이다 마지막날은 연길시를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민속촌과 박물관 그리고 모아산과 연길 시장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택시타고 다니는것도 좋지만 차를 임대하여 기사와 함께 돌아다니느게 좋을듯하여 차를 임대를 하였다

먼저 박물관을 갔다

입구를 뒤문으로 들어가게 해놓아서 3층으로 1층 좌우와 2층 좌우 3층 좌우에 박물관이 있었므며 조선인들의 전통을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관습은 물론 생활습관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답게 박물관이 되어 있었고 어떤면에서 우리 박물관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발해나 동북삼성의 역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중국의 역사를 더 확대하여 가고 있슴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다

일제 항전관도 또 발해국역사관도 또 신석기시대부터 문명발전관도 또 청나라말과 만주국의 일들도 박물관에 오니 한눈에 볼수있었다 11시가 넘어 민속촌으로 갔는데 민속촌이 없었다 그리고 모아산이 있었고 인파들이 많이도 있었다 모아산은 높지는 않었지만 등산을 준비하지 않아 중턱에서 몇백미터 올라가다 내려왔다 12시가 좀 넘어서 연길시 김식원민속산장에서 토종닭을 시켜먹었으나 우리와 먹는 습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많이 남어서 기사 아버님 갔다드리라고 하여 다보를 하여가지고 왔다

먼저 음식을 드리고 종합시장으로 갔다 주차를 하고 시장의 규모를 보니 엄청난 규모라는것이 보였다 5~6층 건물 열동이상 백화점으로 건물도 크고 시장도 다양하여 다 보기를 싶지 않았으나 두루둘보면서 시장의 문화를 접할수있었다 시간이 4~5시경에 민박집으로 왔다 여행은 마무리다 저녁 8시비행기를 타고 천진에 내려갈일만 남었다

민박집 주인에게 비행기 연락유무를 파악하니 상해에서 출발도 안하고 있었다 상해에서 천진으로 와서 연길로 오고 다시 천진 상해로 돌아가는 비행기인데 연락도없이 연착이다

상해에서 출발된것은 확인을 하였다 천진에 도착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비행장으로 가니 출발한다는 시간에 도착을 하였다 9시가 넘으니 비행기 팃켓을 발부하였다 비행기는 아직 오지 않었다

천진에서 출발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였다 그런고로 오기는 오나보다 하고 마냥기다렸다 10시가 되니 비행기도착이다 30분이후에 비행기 출발한다고 한다 다행이다 천진에 도착하여 마중나올차를 전화하여 시간을 대충 알려주고 도착하면 전화하여 오는것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11시30분이 안되어 도착하였다

집에 돌아와 티브이를 켜니 뉴스가 나오고 11시30분경에 천진항 폭팔사고가 났다고 한다

단발의 차이로 비행기가 지나오고 난뒤에 폭팔사고가 난것이다

대부분 비행기는 폭팔사고가 난 상공에서 거의 다 하강을 하는곳이라 위험한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여 백두산과 연길 돈화 화룡 안도현 용정 도문 훈춘 방천여행을 하였다 못가본 왕청이나 경박호와 화룡은 열차로 지나오기만 하곳으로 청산리전투나 본오동 전투지는 가보질 못했다

​이지역은 우리땅이라는 생각이 확신하도록 우리민족이 살었고 살고 있었다

이제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는점에서 조선족 자치주의 위력은 없어지는것 같아서 아쉽고 안타까운 현실을 느끼고 왔다

​2015년 8월 8,9일 백두산 여행 (서파 북파)

전날 도문으로 하여 삼합 용정 윤동주 생가 문학관 이상설 선생역사관과 일송정을 방문하고 열차를 타고 이도 백하 민박집이며 여관으로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아침 5시에 일어나 이도백하(二道白河 얼도바이허)를 출발하여 서파 산행입구로 갔다 개미실 산우들과 연락이 안되어 답답하였지만 개미실 산우들을 기다렸다 40분 기다리는사이에 맑은 하늘이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것을 보고 백두산 천지 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미실 산우 34명을 이렇게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한국에서 만나던 식구들이다

   기념단체 사진 왼쪽 맨뒤가 나다

인파가 없던이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많이 모였다 40%는 한국인이고 중국인이 60%로 더 많다 모두들 이 인원이 금강산가듯 북한으로 올라가면 얼머너 좋을까 하는 생각을 이구동성 이야기하며 표를 들고 들어가며 지문인식을 하고 들어갔다 내일도 이지문으로 확인한다고 한다

버스는 정상 못미처 주차장에 서고 우리는 내리면서 가이드의 이야기에 눈길이 쏠렸다 저기 피레침이 보이니 천지를 볼수 잇다고 말이다

1300여개 이상의 계단을 올라 정상에서 내려다본 천지는 사람이 많어서 비비적거리고 간신히 보기 바쁘고 사진기를 들이대고 찍는것이 온천지의 사람들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천지를 이쪽 저쩍 다니며 보았다 북한땅이라는 비석도 중국땅이라는 비석도 보이고 핸폰으로 천진 전체를 사진으로 담으려니 사람들이 많어서 할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서서 찍어야하는데 할수가 없었다

통쾌하고 후련한 천지를 보고 또 구름이 걷히고 선명하게 보이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수없이 아름다웠다 더욱이 개미실 산우들과 함께하는 천지의 모습을 보는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였다

그러면서 백두산 정계비가 생각이 나고 또 김일성이 이쪽을 중국에다 넘기고 하였다는 생각이 들고 북한으로 오면 얼머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검색하여 함께 보자

 

백두산 정계비 비문 내용

청대

오라촐관 목극등은 국경을 심사하여 와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요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분수령으로 돌에 새긴다는 내용으로 강희51년 5월15일​로

필점식 소이관 이거와 조선군관 이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양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이렇게 쓴것이 없어진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내용은 동쪽의 토문강이다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다 이런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서로 땅을 가지고 빅딜을 한것이 들어나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간도성이 나온다 간도는 다는 아니지만 우리땅이 라고 말하고 싶다 강한 나라가 되어야하고 통일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우리땅은 빼앗겨 버린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도성만 보면 안된다 러시아가 중국과 서로 땅을 나누어가진 정황이 해방후20년사이에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땅이 러시아 위에까지 있었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것이다

러시아가 대련까지 내려오고 일본과 러일전쟁에서 패하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나가 패하고 만주국이 만들어지고 하면서 철도권으로 만주협약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국경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꼴이 된것이다 나라가 강해야한다는것 우리는 실감하며 더 강한나라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강성 국가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돈화나 훙춘 연길을 돌면서 발해사에 대한 역사유물을 발굴하는 중국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중국 공정이 이런것이구나라는것을 느낌을 받었다

위지도가 아니라도 북간도 서간도의 지도를 보면 백두산 정계비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아닐수 없다 아래지도를 보면 바로 이해가 간다

 

 

 

 

 

위의 두지도가 우리땅이라는 명백한 지도라고 보면 된다

​우리민족이 살었던곳이며 또 한인학교가 있던 울라지보스또크에는 심련수시인 5형제가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란곡리 399번지에서 태어나 이주하여 학교에 다니다가 러시아인들의 학대로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공제촌으로 내려와 살다가 가족이 용정으로 내려와 사는관계로 용정에서 자라고 공부도 하고 또 영안현에서 교감생활도 하다가 왕청현에서 살해된 심련수시인의 일생을 보더라도 우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전에는 우리민족이 살던곳이고 학교가 세워지고 생활의 터전이 되던곳이 우리땅이라고 할수밖에 없는곳들이다 일제의 간도협약이나 러시아의 남침으로 인한 러일전쟁등이 현재의 지도를 만들어 놓은 최악의 영토가 되었슴을 우리는 알어야할것이다

삶의 터전이고 또 이순신장군이 녹둔도(두만강에 있는 여의도세배의 섬)에서 진을 치고 있던곳이 러시아땅이 된것을 우리는 알어야한다

여행기를 쓰면서 느낀 이야기를 쓰다보니 안타까워 다른곳으로 흘렀다 며칠 여행하면서 더 이야기가 나오것으로 본다

 

​다시 돌아가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는 꼭 우리 민족이 알어두어야할 사항임을 인지하고 서파에서 내려오면서 금강대협곡입구에서 점심을 비빔밥으로 먹고 협곡의 자연의 조화를 보며 다시한번 놀랄수밖에 없었다

삐죽삐죽하게 남은 바위가 여러가지 모양을 하고 협곡에 남아서 깊은 곳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형상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꼈다

많은 인파속에서 나는 개미실 산우들과 함께 ​전진안마를 받고 닭백숙을 맛있게 얻어먹고 나의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늦었지만 천지의 환희가 가시질 않었다

이도백하 민박집 주인 길철호씨와 다음날 북파를 가기위하여 잠깐 이야가를하고 새벽 다섯시에 출발을 위하여 잠을 청하고 4시반에 일어나 씻고 가방을 정리한뒤 ​5시에 출발하여 북파입구에 도착하니 접수하는 사람이 많었다

김철호씨가 출입증이 있어 나는 관리자가 들어가는곳으로 들어거 손쉽게 차량표를 구입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개미실 산우들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가이드가 접수하는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0분도 안되는데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김철호민막집 주인이야기가 거의 맞는 말이다 일찍가야한다고 한말이 실감이 났다

김국철 개미실 가이드가 들어오고 또 개미실친구들이 들어와 함께 40인승 버스를 타고 어느정도 오르다가 찝차로 갈아타고 올라갔다

북파정상은 어제 장상보다 높고 중국쪽으로는 제일 높은곳으로 꼬불꼬불 차는 힙있게 올라가는데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기가 짝이 없는곳을 오르고 또 올라서 정상에는 관리하는 휴게소 집이 지어질정도로 넓은 터가 있었고 세곳으로 나누어 볼수있는 곳이었다

정상부터 내려오면서 보았어야하는데 나는 중간에 두군데만 보았기에 아쉬움이 있지만 구름이 자욱하여 천지는 볼수가 없었다

3분이 지났을까 구름이 걷치면서 천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이드말처럼 산이 가려 보이는곳과 안보이는곳등 부분부분만 천지 보였다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모두들 함성이 쏟아 나왔다 구름이 걷치는 장면과 천지가 햇볕이 드는 장면은 정말 멋지었다 자리를 옴겨 다른쪽을 보는데 멀리 계단이 보인다 저기가 북한에서 내려오는 그야말로 천지 물을 떠볼수있는곳이란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남파에서 오르면 거의 볼수가 있는곳이란다

이렇게 양이틀동안 천지를 볼수있는 행운을 맛보는 것은 천운이라고들 카톡으로 격려를 해주는 친구르이 많었다

한시간정도 정상에서 시간을 보낸듯하다 그사이 우리들은 이슬이를 정상주를 준비한 개미실 친구들이 있어 어제는 못한 몇잔 마시시 더 기분이 좋았다

개미실 산우 친구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이제야 해봅니다

하산을 하여 장백폭포에서 우리를 내려주어 걸어서 장백폭포를 구경하였다

오르곳에 온천이 나와서 옥수수와 겨란삶은것을 사먹기도 하였다 유일하게 천지에서 흐르는 장백폭포를 멀찍이서 감상하고 인증샸도 하고 우리 일행들은 행복감이 넘쳐 흘렀다 잠깐 비가 오는듯하더니 이내 맑어서 더 좋은 관광을 하였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소천지와 녹연담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걷기좋게 길을 만들어 놓아 힘든지도 모르고 자연의 야생화도 구경하며 내려왔다 녹연담에 내려오니 식당이 있었다 모두가 코스처럼 시간이 맞었다

여기서는 돌솥비빕밥이었다 어제보다는 맛이 있었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처음 접수한곳에 도착하니 2시가 안되었다 김철호씨와 김국철씨가 아는사이라 버스를 같이 타고 와서 내가 묵은 숙소에 내려주고 갔다 알어보니 4시반 기차가 있다고 한다

김철호씨는 이도백하에서 한족과 결혼하여 처음엔 집에서 민박집을 하다가 지금은 여관처럼 건물을 임대하여 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안주는것이 흠이기는 해도 집도 깨끗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또 조금 비용을 더주면 서파든 북파는 입장표나 교통편도 또 안내도 버스표도 구입하여 손수 안내를 해주기에 편하고 무리없이 여행할수 있다

물론 언어도 한국어가 어느정도 되기에 더 좋다 한족학교를 다녀서 글자는 모르고 말은 한다고 한다

여행에 불편한것이 하나도 없이 잘 해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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