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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영화 황제 김염(電影皇帝 진옌).

泉玟 김동석 2014. 12. 29. 01:53

영화황제 김염(電影皇帝 진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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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상해영화계의 별이자 조국광복을 열망한 항일조선인. 당시 상해 영화잡지 『전성(電聲)』에서 영화황제를 뽑는 인기투표가 있었다. 단연 김염은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이 세 질문에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매력적인 외모와 단련된 몸매도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930년대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김염의 행동, 김염의 모든 것이 전 중국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다. 그 때 얻은 ‘영화황제’라는 칭호는 이후 그와 비견되는 배우가 없어, 유일한 호칭이 되었다.



편지봉투에 주소 없이 ‘중국 상해 김염과 진이’라고만 써도 그에게 편지가 전달될 정도로 김염은 중국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남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공중파 방송을 탄 것은 1996년 4월 28일 KBS에서 방영한 기록영화 <상해의 영화황제>와 2003년 9월 ‘TV 책을 말하다’ 정도다. 그러다가 이번 광주국제영화제에서 김염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왜 그간 소개되지 않았는가. 반공을 국시로 하던 이남정부와 중국정부가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남에 들어온 중국영화는 대만과 홍콩의 무협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염이 출연한 진보적인 내용의 영화들은 이유야 어쨌든 소개될 수 없었던 것이다.

8년 이상 전 세계를 돌며 김염의 흔적과 그의 영화세계를 파헤친 한 연구자에 의해 그의 모습이 세상에 크게 소개되었다. 바로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저자 박규원씨다. 그에게 김염은 작은 외할아버지가 된다. 그는 김염을 알기 위해 열정적으로 자료를 수집했고 8년의 공력은 한 권의 책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번 광주국제영화제에서 김염회고전을 기획, 주관한 프로그래머 조복례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조복례교수는 김염의 영화에 대해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선도적인 인물이다. 17세에 중국영화계에 입문한지 5년만에 중국 최고의 배우가 된 김염. 그의 삶과 영화는 오늘 코리아(COREA) 영화계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1. 김염의 불꽃같은 삶과 사랑


17세 청년, 영화계에 입문

1927년 상해로 간 김염은 영화 단역부터 출연하고, 기록계원 등의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일했다. 얼마안가 김염은 자신의 영화관에 큰 영향을 미친 전한감독을 만나게 된다. 전한감독은 김염의 세계관, 예술관, 연기철학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인데, 김염은 그의 지도로 <살로메>, <카르멘> 등의 연극에서 좋은 연기를 창조해 인정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 열정과는 달리 좀처럼 영화에서는 기회가 없어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을 손유감독을 만나게 된다. 손유감독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영화연구소에서 수학한 실력파 감독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하고, 전격적으로 <풍류검객>이란 첫 영화에 주인공역을 맡겼다. 세 도둑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풍류검객>은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내용적 평가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처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실패하자 김염은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손유감독은 두 번째 영화 <야초한화> (1930)의 주인공으로 다시 김염을 발탁했다. 영화는 부잣집 청년이 봉건사회의 계급질서를 뛰어넘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봉건적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형상해 낸 김염과 하층계급 처녀역을 잘 연기한 완영옥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된다. 기존의 부르주아적이고 낡은 내용이 아닌 진보적이고 새로운 내용에다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야초한화> 이후 손유감독은 중국의 하층민들을 그리거나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작품들에서 대부분 김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22살에 영화황제가 되다

1930년대 상해시절은 김염의 영화인생에서 절정에 해당한다. ‘영화황제’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때다. 이 시절 김염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진보적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 청년이 현실을 인식하고 항일에 나서는 이야기인 손유감독의 <들장미>(1932), 한 여성의 운명을 통해 낡은 생활방식을 비판한 <모성지광>(1933), 중국인민들의 항일염원을 도로건설청년노동자들의 건설투쟁을 통해 보여준 김염-손유의 대표작 <대로>(1934), 일제를 비유하는 도적떼를 맞아 마을주민들이 단결된 힘으로 격퇴한다는 내용의 항일영화인 오영강감독의 <장지릉운> (1936) 등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대로>의 주제가 <선봉개로>와 <위대한 길의 노래> 등은 당시 중국 젊은이들의 항일유행가가 될 정도였다. 일제의 침략이 전면화되고 국민당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중국인민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김염은 193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 김염은 7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40년 중국 최초의 공군영화인 <장공만리>에서 김염은 중국 공군병사의 애국심과 항일투쟁을 잘 연기하며 영화로나마 평소의 꿈인 비행사가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염은 1941년 12월 8일 다시 홍콩에서 내륙으로 들어간다. 일제패망 후 찍은 <승룡쾌서>(1948)는 국민당 관리들의 실정과 부정부패를 폭로한 내용으로 국민당일파를 강하게 풍자, 비판했다. 1944년 성도의 사천극장에 올린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당시 연극을 본 사람들은 로미오역을 완벽하게 창조한 김염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까지 중국역사상 로미오역을 가장 잘 연기해냈다고 평가한다.


1949년 마침내 부패한 장개석국민당일파가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아내 진이가 열렬한 중국공산당원이었던 반면 김염은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상해영화제작소 예술위원회 부주임, 상해 인민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 영화예술인, 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했고 새 중국 건설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 무렵 중년의 김염은 왕이감독의 역작 <폭풍속의 매>(1957)에 출연한다.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민당세력에 맞서는 순결한 청년혁명가들을 형상하며, 홍군과 마을사람들의 단결로 항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작이다. 영화에서 김염은 원숙하고 중후한 연기를 잘 보여줬다. 김염은 중국공산당정권 수립 후 6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황제라는 명성에 비해 김염은 오직 42편의 작품에서만 주인공으로 연기했다. 그는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았다. 항상 정의로운 사상이 들어있는 극본에만 관심을 두었고 뜻이 좋지 못한 작품은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 김염의 능력을 발굴하고 그와 7편의 영화를 함께 찍으며 절친했던 손유감독은 김염의 그런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손유감독은 정의롭고 진취적인 청년, 억울한 민중들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청년, 신분을 뛰어넘어 고상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 청년 등 ‘김염다운 영화’만을 제안했다.


문화대혁명과 부인 진이

김염을 말할 때는 진이를 함께 얘기해야 한다. 첫 번째 부인인 배우 왕인미와 <들장미>, <장지릉운> 등을 같이 찍었다. 그러나 성격상의 차이와 항전시기의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은 파경을 맞게 된다. 그 후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김염은 1947년 배우 진이와 결혼하면서 생활과 사상이 크게 정돈되었다. 이후 줄곧 진이는 김염의 곁에서 영화와 인생을 함께 했다. 김염은 일제침략시기나 국민당탄압시기보다 문화대혁명 때 더 큰 시련을 겪었다. 1966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오류와 강청의 야욕이 빚은 10년내란기였다. 강청은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1930년대 상해 연극, 영화예술들을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숙청했다. 이때 김염도 숙청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영화계를 떠나있고 평소 성실히 노동하는 그는 더 탄압받을 수 없었다. 다만 진이까지 집을 떠나 격리조치됨으로써 외아들 김첩이 정신장애를 앓게 된다.


시련기를 보내며 건강이 쇠약해진 김염은 요양원 생활을 거쳐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김염의 묘와 부조는 상해 복수원(중국의 국립묘지)에 완영옥의 전신와상과 함께 영화인으로는 유일하게 안장되어 있다. 1930년대 영화황제 김염의 명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중국을 호령한 여배우 진이. 그는 청년시절 이미 공산주의청년동맹 활동을 했고 열렬한 중국공산당 당원인 진보예술가이다. 당원으로서, 김염과 문화대혁명의 시련기를 이겨낸 동지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진이는 중국인들의 큰 존경을 받고 있다. 83세인 진이는 현재 상해영화협회 회장직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김염의 사상과 투쟁

김염의 항일정신, 그리고 민중성

김염(본명은 김덕린)은 1910년 4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에서 수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이며 신민회 활동에 참여한 항일투사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을 피해 1911년 서울을 떠나 서간도로 갔고, 이상촌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절친한 친구인 안창호는 아들 이름을 김필순의 영어이름인 필립으로 지을 정도였다. 김필순의 누이 김순애, 처남 서병호와 김규식, 조카 김마리아 그리고 서병호의 아들 서재현 등 여섯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같은 집안이다. 김덕홍, 김위, 김로, 서재현 등 김염의 형제자매들도 대부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항일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김염이 항일의식과 진보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던 김염은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항상 약자와 빈곤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 민중들에게 각별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김염의 민중적 품성은 그가 연기한 영화속 인물들과 너무나 닮아있다. <대로>의 청년노동자, <일전매>의 정의로운 경비대장(나중에 의적이 된다), <장지릉운>의 도적을 물리치는 청년지도자, <폭풍속의 매>의 홍군과 연합해 마을을 지키는 장년지도자. 모두가 김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김염은 자신의 항일의식과 진보성, 민중성을 모두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시켜 연기했다. 생활과 사상을 반영한 김염의 연기는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웠고 관객은 그의 연기와 영화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항일, 그리고 진보적 영화를 위하여

집안 어른들, 형제들과 달리 그의 항일운동방식은 영화였다. 항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공군비행사 시험에 응시했다가 불합격한 적이 있는 김염은 결국 영화를 통해 이 꿈을 이뤄냈다. 김염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사회현실을 보여주며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진보적인 사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1933년 2월. 상해에서 중국전영문화협회가 설립되자, 전한선생의 지도를 받은 김염은 자신의 예술관이 그대로 드러난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배우는 자신의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하고, 항일반제투쟁을 불러일으키는데 힘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손유감독, 오영강감독도 항일영화를 만들기 위해 김염과 많은 시간 토론을 하며 극본을 만들어 냈다.

그는 영화황제로서, 예술가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운동하고 스스로를 단련한 건강한 청년이었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뒤돌아서서 험담하지 않았다. 강직한 성격에 고지식하고 말이 없는 사람. 후배들은 영화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그런 사상과 인격, 그리고 고상한 정신세계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하기에 오늘 13억 중국인과 중국영화계가 ‘영화황제’로 회고하는 김염은 배우를 넘어 ‘진보적인 예술가’인 것이다.


3. 중국영화 100년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지난 1995년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영화계가 선정한 대표적인 영화인들이 있다. 감독으로는 손유, 정군리 등이 뽑혔고, 여자배우로는 중국의 ‘전영황후’로 불리는 완영옥을 비롯해서 호접, 백양, 여리리, 왕인미, 진이 등이 이름에 올랐다. 그러면 남자배우는 어떨까. 조단, 유경, 한난군 등의 이름보다 맨 위에 있는 이름은 바로, 김염이다. 중국이 나라 잃은 조선출신 배우를 20세기 중국영화사상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중국영화계는 지금 중국영화역사 100주년 영화제 준비로 들떠있다. 관심은 중국을 빛낸 100편의 영화 중 3편이 될 김염의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대로>는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토론중이라고 한다. 김염의 영화역사는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

항일시대 진보주의자로서, 1930년대 상해영화를 이끌었던 진보적 영화예술가로서 김염은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냉전시기 김염은 이남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이북에만 다녀가야 했다. 탈냉전시기이자 6.15통일시대인 오늘 더 이상 항일조선인이자 조국의 명예를 드높인 김염은 감추어진 역사일 수 없다. 4회 광주국제영화제가 그 기치에 맞게 ‘발견, 재발견’한 항일 영화황제 김염은 우리 영화계와 문화계,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재보이다. 조국의 분단을 가슴아파하고 조국통일을 열렬히 염원했던 김염의 뜻이 그 부인 진이를 통해, 그 후손과 후배들을 통해 맥박친다. 내년 중국영화 100주년과 때를 같이하여 그의 영화들이 더 많이 그의 고향 서울에서 상영되기를 기대한다. 진보적인 영화시사 월간지 『COREA』도 이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영필_ realism@nc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