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및 기행문

39 “우리 동포들은 멋있다”

泉玟 김동석 2014. 12. 28. 23:51

우리 동포들은 멋있다

   (중국에서 살면서 그들의 삶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천진공항은 중국 직할시에 비하면 북경이 있어 작은 편이다

2001 823 천진공항에 내리니 그렇게 더운 편이 아니었다

중국이라고는 한달 전에 사업 타진 차 온 것이 전부로 이제 법인설립을 하고 공장 가동을 하려고 들어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꾸리고 자재를 구입하고 생산을 하여 대기업에 납품을 60일 만에 하여야 하는 숙명에 처한 것이다

그것도 수량이 대량 이어 자칫 납품을 못하면 대기업 라인이 줄줄이 서고 수출에도 차질을 갖게 되어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순전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 동포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들과 접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문화가 다르게 성장한 우리 동포들이기에 말을 한다고는 하나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은 일을 하면서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서야 일을 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고 이해를 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을 할 때 육하원칙에 의하여 설명하고 또 이해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종종 한국사람들 사이에 이로 인하여 일이 매끄럽지 못한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들을 해주었다

우리직원들도 4~5명 정도 관리 생산 자재 출납 등에서 포진하여 나를 도와서 일을 해주어 2004년도 말까지 많은 실적을 낼 수가 있었기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어 회사 가까운 곳의 조선족 노년연우회에서 동현 회장님이 회사를 찾아 오시어 서로 교류를 하자고 하시었다

당시 나도 천우회라고 천진에서 한국기업들간에 친목단체를 만들었는데 회원이 80여명으로 회사 일을 하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가자고 하여 만들어 한 달에 한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2005년 초부터 찾아 뵙기로 하고 꾸준히 만나게 된 것이 천우회는 해체가 되었어도 초대되어 즐거움을 같이 하였다.

우리의 인연은 뒤에 가면서 이야기 하기로 하고 2007 5 2일에도 "천진시 조선족 노년 연우회" 동려구 분회 창립 7주년 행사에 초대되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온 적이 있어 간추려 본다

동려구 연우회 는 회원이 초창기 20여명 이더니 지금은80명이 넘는다 자격이 55세 이상이다 어찌 보면 노인회다

본 연우회는 2000년 5월 2 김한범 선생의 도움으로

천진시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교포들의 노년회가 정식으로 동려구 선봉로에 60평방 미터를 얻어 발족하였단다

초대회장은 박춘보 선생님이셨고 현재는 천진시 총 노년회 부회장을 맡고 계시다

2대회장은 선생님이시며 현재는 김우현 3대회장이 활동하고 계시다 잠깐 김한범선생을 소개해보면 흑룡강성 오상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경북 선산이 고향이시라고 한다 부인은 6살 때 중국으로 오신 한국 1세대 사람이다 하얼빈에서 가까운 오상고등학교를 나오시고 군인에 입대하여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천진에서 머물게 되어1988년도에 천진시 조선족협회를 창설하였고1990년도부터 2000년까지 조선족 협회 회장을 역임하셨다 1993년에는 조선족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한국기업도 이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리라고 믿는다 한국상회 성증석 회장님이나 올 여름에 고인이 되신 강재형 회장님도 잘 아시는 것을 보면 그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도와 주셨을 것 같다

이분들은 춤도 배우시고 무용도 배우시고 어느 날부터 손풍금(아코디언)만 있더니 테너섹스폰도 크라리넷도 바리톤 트럼본 큰 전자올겐도 생겼다 앨토섹스폰도 생기더니 이제는 트럼펫도 있다 북과 장구로 드럼과 대북을 대신하지만 정식 관악대로 출범을 하여 활동하고 계시다2006년 동려구 군중 문화 예술단체로 정식 등록 확인하고 신립가 문화 관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그 활동도 대단하다 동려구에서 천진시로 천진시 에서 하북성 성시인 석가장에서 하는 북방(북경, 천진, 하북, 내몽골)대회에서도 3등 상을 받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 동안 크고 작은 행사를 40차례 출연하여 20건의 상을 받았으며 관현악대, 전통 무용대, 성악대, 사물놀이 등 이제는 연출할 수 있는 다양한 레파토리가 있으시다 의상도 모든 춤마다 다른데 개별적으로 돈을 들여 사시고 만든 것이다

악기도 개별적으로 사신 것이다

2007 7주년 행사에 천진시에 있는 조선족 원로 분 이신 이한범 선생과 이부림 선생은 80이 훨씬 넘으신 분은 물론 현 조선족 협의회 이창희 총회장님 조봉옥 부회장님 박춘보 부회장님 현 조선족 노년회 이광수 회장님 장길순 부회장님 대항구 유회장님과 하동구 최회장님 하서구 회장님 등 모두 모이셨다 그리고 동려구 2대회장 지동현선생님,김태환부회장님 현 회장이신 김우현회장님 오철수부회장님 등 천진시 조선족 노년 연우회가 지역별로 있는데 오늘 모두 참석 하신 것이다 

사회의 개회사가 선포되고 경과보고가 있었다

그 동안의 7년간의 경과가 화려할 정도로 많은 일들을 하셨다

김우현회장의 인사말씀도 지난 일들을 회고 하면서 더욱더 발전하는 우리민족이 되고 잘살고 행복한 우리민족이 되자고 연설을 하셨다

현 천진시 조선족 협의회 이창희회장의 축사와 초대며 2000년까지 회장을 하신 원로 김한범 선생님의 축사에는 축하의 메시지가 듬뿍 담아져 있었고 더욱더 잘살자 더욱더 행복하자 더욱더 발전하자라고 강조하시는 축사가 감동 그 자체였다 나도 축사를 부탁을 받아 이렇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대단하시며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나도 한국인은 혼자이면서 축사를 해달라고 하여 축사를 해드렸는데 우리 민족의 발자취와 열심히 살아가시며 우리말과 문화를 계승 발전해가는 모습에 늘 감명을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뒤이어 악대가 화목한 연우회가를 작사 작곡 편곡까지 하여 연주를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서 연출이 시작되었다 샛별 유치원의 재롱잔치와 부채춤, 노들강변, 동이 춤, 양산도 춤 등과 관악대의 연출을 한국에서도 못 보는 것을 보았다 재롱 잔치 중에는 패션쇼가 아주 인상 깊게 재미 있었고 부채춤이나 노들강변, 동이 춤 등 우리 전통 춤은 황홀할 정도였다 관 악대는 강약과 웅장함과 찢어 질듯한 소리가 잘 조화되어 우리노래들이 잘 편곡되어 연주가 되었다 이쯤 되면 관악 대 소개를 안 할 수 없다 잠시 악대를 소개하면 전자 올 겐 김정연 여자 56세 조선말을 못하지만 조선노래는 수백 곡을 안보고 노래하고 반주도 한다 크라이넷은 최남식69최정무63 2명이 있으시고 트럼펫 김중호67(별도 소개를 하겠슴)계시며 앨토 섹스폰 권오현56, 테너 섹스폰 이영찬 57세가 계시다 트럼본은  최순철59 18년 경력 이시란다 바리톤을 하시는 이해욜님은 64세로 악보를 잘 못 보시는데 어느 곡이던 한번 듣고는 척척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장구잡이는  여자 박영숙61세님과 북잡이는 여자 남신옥 62세님이다

이분들은 작사도 하시고 작곡 악보도 그리고 편곡도 하신다 사물놀이도 잘 하시는데 우리의 전통악기가 없다 연세가 많은 만큼이나 모두들의 경력은 대단하신 분들이다

그렇다 정말 대단하다 그들은 이 정도는 자랑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대단한 실력이다 60이 넘은 분들이 각자의 삶이 행복해 보였다 또한 잊혀져 가는 우리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이국 땅인 중국에서 말이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몰라도 이건 한국정부에서도 지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후세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어가려면 한국 정부에서 지원이 된다면 이들도 관심을 갖고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분들 중에서 특별하여 트럼펫을 부는 김중호씨를 잠깐 소개하면 트럼펫에 특허를 2개나 가지고 하나는 나팔이 하나 더 나와 있는 트럼펫이다 고음과 저음이 2옥타브 정도는 더 올리고 내리고 하는 악기다 또 하나는 키를 하나로 하여 음을 내는 기구다 평소에는 3개의 키로 하는데 또 다른 키로3개의 키를 대신할 수도 있어 특허를 냈다고 한다 북경올림픽에서 정식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도 있다 최남식 선생님 등 전대원이 모든 악기를 잘 다루어 여쭈어 보았더니 음악선생을 하셨다고 한다 그것도 30년 정도 수준급임을 입증할 수가 있었다 기념촬영과 만찬 그리고 사교춤이며 일반적인 춤 그리고 노래 모든 면에서 우리 한국인들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60이 넘어 저렇게 여가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도 또 생각해보아도 어려울 듯 싶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노래방기계가 오래된 아리랑기기였다 또한 DVD는 신형이고 하니 맞지를 않는다 노래방기계가 아주 고물이다 교체를 하고 싶은데 오래된 것을 잘 쓰고 계시다 사물놀이를 잘 하시고 벙거지도 잘 돌리시고 하는데 오늘은 악기를 빌려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꽹과리와 징은 중국에는 없단다 사물놀이 한 세트 준비 하려면 돈이 제법 드는 모양이다 아쉽게도 오늘은 사물놀이를 보지 못 하였다 또 자랑거리가 있다 사진기사가 또 수준급이다 캠코더를 전에는 아주 큰 것을 가지고 있더니 오늘은 아주 신형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며칠 후면 오늘 찍은 사진을 각색하여 CD로 구어 올 것이다 매번 마다 찍은 CD가 역사로 남아있기에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 싶다2005년 처음 만났을 때 찍은 CD가 있어 가지고 와서 복사를 하려고 하니 안되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올려본다 우리민족의 우수함을 느꼈다 나도 이제 환갑이니 이렇게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다 우리민족은 역시 대단하다 하나가 되는 모습과 서로 도우며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조선인이요 고려인이요 한국인이 되자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국인이 되자 우리가 가난으로 인해 얼마나 배가 고팠는가 이들의 가난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 넓은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개간하여 농사를 일구어 살기도 하고 또 우리문화를 계승하면서 단합하면서 의지가 되어주고 언어도 꾸준히 계승하고 잇는 이들을 보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도 지금 큰 일자리는 없지만 자녀들이 여기서 살고 있기에 별도의 집을 마련하여 자식들과 손자들 옆에서 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이신다 

또 한가지를 예를 들어 보면 2011 12 20일이다 이때도 2011년 총회인듯하였다

회장도 다시 뽑고 올 살림살이도 이야기하고 내년도 살림은 어찌 살까 하는 그런 이야기의 자리인듯하다 여자 회장님이신 5대회장이 6대회장으로 다시 뽑히셨다

총회가 끝나고 박춘보 선생님이 길림신문을 들고 나오셔서 낭독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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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시 유일한 조선족마을이 이제 사라지네" 라는 제목의 신문제목이다

중국 천진시 동려구 보원촌 여기는 몇 해 전만해도 조선족 소학교와 유치원이 있었고 식당도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도 없어지고 우리 교민이 사는 곳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것이다 개발 계획에 잡혀 있는 곳으로 아파트가 들어올지 공장이 들어올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보원촌 마을이 조선족 마을로 생긴 것은 심양에서 살다가 당시 김진근조교(북조선교포사업가)가 세우려는 유지공장에 온 것인데 계획이 무산되어 보원촌에 정착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가 1955년 2월 18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한다

리락진, 최륙선, 리우석, 리경심, 그리고 18살때 외삼촌을 따라 어머니를 모시고 6가구가 온 것으로 회사취업은 안되고 보원촌에 살집을 마련하고 소금물이 나는 갈대밭을 파고 또 파면서 찔리고 또 찔리면서 논농사를 짓기까지는 숫한 역경이 있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전기는 1973년에 들어 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등잔 호롱불에 밤을 새우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제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남아있는 본인의 젊은 날과 지난 세월의 조선족의 천진역사를 알리고 싶고 또 없어질 위기에 모인 보원촌 조선족 마을을 살릴 수 없을까 하는 생각뿐이시다

아래 신문기사를 보면 샛별 조선족 소학교라고 간판이 남아있다 12가구가 있던 우리민족의 호구가 이제는 6가구만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박춘보선생님과 김로명선생님 2가구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하신다

이것도 마을의 집을 팔고 나오셔서 근거가 없는 셈이 되었다 하시며 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어찌 해보고 싶은데 이제는 도리가 없다고 하신다 사진은 70이 넘으신 박춘보 선생님과 김로명 선생님 사진과 촌사무실 그리고 입구사진이 보이며 지금도 남아있는 박씨네 보신탕집이 간판으로 남아있으나 앞으로 이 마을이 우리들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박춘보 선생님을 오늘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데 자기가 나서서 조선족 마을을 살릴 수 있다면 남은 여생을 힘쓸 것이라는 의지가 보이셨다 몇 번을 마음먹었다가도 아들딸들이 만류하여 이제는 73세의 고령에 자식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는 게 우리민족에게 죄를 지는 것 같다고 하셨다

아쉬운 마음을 토로 하시었다

내가 천진에 오니 샛별 소학교와 유치원이 있었는데 그때는 학교를 우리동포가 학교를 세웠는데 재력이 부족하여 적자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나마 한국인들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어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많이 하였다 도로 포장도 해병대 전우회에서 해주고 또 학교에 전력비나 겨울에는 석탄을 구입해야 하는데 십시일반 성금으로 또는 기부금으로 조달을 매년 하여 드렸다 나 또한 김종칠회장님의 소개로 육 교장선생님이 연결되어 매년 적지만 성금을 낸 적이 있었다

이 글은 쓰는 배경은 우리민족이 이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어떤 관심을 갖고 살고 있는가 혹시 그 들에게 소홀하거나 적대시 한적은 없는가 한번 되돌아 보며 우리 동포들이 언어가 있고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데 우리 정부나 단체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등등 생각하여 전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먼저 지원이 되어서 그들로 하여금 우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알리고 세계에서 우뚝 서는 민족으로 만들며 그 고국이 자랑스럽도록 힘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민족의 무궁함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다

그들은 한국이 잘 살아야 우리가 버팀목으로 힘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시면서 북한도 빨리 부강한 나라가 되어주어 서로 왕래가 되기를 희망하는 천진 조선족을 보면서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한가지 내가 바라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해외에서 우리 동포나 교포가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유치원부터 초등하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하는데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예를 든다면 지금까지는 자녀들이 우리말을 가르치는 곳이 있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한족학교에 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을 모르는 동포 아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천진시에는 우리민족이 한국인 오만 명과 교포가 20만 명은 족히 있는데 학교를 세워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으로 중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배우는 비용과 같이하여 지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말 간절하게 필요한 사항이다

그들의 선조는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와서 독립운동도 하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열심히 살면서 우리 문화 언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계시다는 것이며 한국에서 잊혀져 가는 부채춤 동이 춤 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한국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돈이 아니고 이런 교육기관이 있으므로 해서 그들이 언어를 계승하고 필요하다면 현지 중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려고 입학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이것이야 말로 대한민국이 영원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현재 까지는 우리 동포들은 멋 있다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며 관심을 우리정부는 가져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우리 민족의 무궁함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