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은 30에 요절하였으나 영원히 살아 있다
개미실 산우회에서 79차 산행이며 2012년 시산제를 금병산에서 하였다
춘천은 오랫많이 오는곳이다
얼마전 전철이 개통되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특히 주말이면
더욱 이용이 되고 있는데 이 금병산은 김유정 현대문하가가의 고향이다
전철역부터 김유정역이며 마을의 이름이나 산행 등산로도 김유정이의 작품으로
이름이 지어져 있다
짦은 생애를 가진 김유정은 30년도 못살았지만 아마 영원히 살아서 잇을것 같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 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연대별로 나열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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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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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1.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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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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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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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총각과 맹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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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8.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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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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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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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소낙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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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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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 29~2.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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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金따는 콩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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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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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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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닙히푸르러 가시든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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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2.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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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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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3.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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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노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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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中央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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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3.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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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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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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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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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4.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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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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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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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산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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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6.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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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文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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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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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만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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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9.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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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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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7. 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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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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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申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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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9. 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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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朝鮮의 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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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申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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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0. 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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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나와 귀뚜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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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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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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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봄.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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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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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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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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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0.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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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海公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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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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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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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6.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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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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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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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봄과 따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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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1.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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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文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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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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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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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1.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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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海公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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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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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두꺼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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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小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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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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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봄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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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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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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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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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이런音樂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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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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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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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동백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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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3.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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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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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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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五月의 산골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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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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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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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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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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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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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電車가 喜劇을 낳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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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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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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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夜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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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4.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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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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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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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옥토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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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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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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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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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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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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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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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生의 伴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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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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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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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貞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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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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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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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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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幸福을 등진 情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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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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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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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밤이 조금만 잘럿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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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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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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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슬픈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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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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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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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우리의 情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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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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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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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응답 |
文壇에 올리는 말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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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0.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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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文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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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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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江原道 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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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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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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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炳床迎春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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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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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 29~2.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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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따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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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1.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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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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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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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땡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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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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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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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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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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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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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炳床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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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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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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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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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네가 봄이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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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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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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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귀여운 少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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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申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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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4. 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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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동화 |
정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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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8.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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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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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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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姜鷺鄕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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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4.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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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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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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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朴泰遠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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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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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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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잃어버린 寶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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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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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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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설 |
두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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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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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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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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鑛業朝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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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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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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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12.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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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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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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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필승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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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3.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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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文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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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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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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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이 고향에 내려와 야학교 세운 금병의 숙을 알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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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데다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
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의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또한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
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짚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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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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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
김유정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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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머물었던 기간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1년 7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박록주를 향했던 그 병적 열정이 탈바꿈되어 새로운 길을 찾음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인근부락 청년들이 볼 때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
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 청년들을 깨우치는 일에
어느 정도 신명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가 들병이를 찾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허망하게 비어드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 오막살이 돌쇠네 집에 들러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그의 처녀작이 된 『산골 나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실레 마을에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으며 욕을 잘하는
박봉필이란 사람을 관심깊이 살펴보곤 했다. 나중에 그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 바로 『봄봄』이다.
『총각과 맹꽁이』『소낙비』『노다지』『산골』『동백꽃』『만무방』『금따는콩밭』『안해』『가을』『두포전』 등이 모두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김유정 기념관의 사진을 찍어서 남겨 본다
김유정은 30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지만
그는 영원히 고행마을에서 살아 영원하게 살아 있는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