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은 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던가
그리고 정감과 이심이라는 대화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래 비석에 보면 뒷바침하는것 같다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여러 가지의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의 집성이며 이본(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감록≫에 포함되는 문헌으로는 각종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결을 비롯하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무학비결(無學秘訣)·도선비결(道詵秘訣)·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징비기(徵秘記)·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 수십 가지가 있다.
≪정감록≫의 저자나 성립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감록≫은 반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였으며 민간에 은밀히 전승되어 왔다.
작자를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고 보기도 하나, 이는 ≪정감록≫이 정감과 이심의 대화형식으로 서술된 까닭에 그렇게 보는 것이며, 이들은 전설적인 인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조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정감록≫이 한 사람의 인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용이 다양한 수십여 편의 비결류의 집성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형식면에서도 예언설·참요(讖謠)·역수(易數)의 풀이나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도 유교의 외도(外道)나 도교 및 참위설·음양오행설의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감록≫이 만들어지고, 민간에 숨겨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반왕조적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運世)의 법칙과 결부시키려 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정감록≫은 억눌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사본으로 수전(手傳)되어 내려왔으며, 그동안 이들에 의하여 첨삭이 가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사회 혼란이 극심하고 개인적인 자기보전에 급급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는, 첫째 지명고적 관점(地名考的觀點)에서 조선시대에 바뀐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 둘째 세조·성종 때의 분서목(焚書目)에 ≪정감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셋째 ≪인조실록≫에 있는 ‘초포조입계룡건도(草浦潮入鷄龍建都)’라는 문구에 ≪정감록≫의 계룡산천도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내용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卜定:점쳐서 정하는 것)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鄭氏) 성의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이다.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의 이상경(理想境)에 대한 동경이 ≪정감록≫ 전반을 꿰뚫고 흐르고 있다.
따라서 자연지리적 조건을 음양오행설과 결부시켜 해석한 풍수지리설이 원용되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징으로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은어(隱語)·우의(寓意)·시구(詩句)·파자(破字)를 사용하여 해석이 난삽하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당초에는 병화를 피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사상이 ≪정감록≫과 관련하여 민심에 크게 우합(偶合)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하대로 내려올수록 반왕조적인 색깔이 짙어져서 반란이나 대소규모의 민란은 모두가 ≪정감록≫에서 우러나온 진인출현설이 압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세기의 민중운동이 모두 ≪정감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동학을 기점으로 속출한 한국의 종교운동이 거의 모두가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정감록≫은 신비하고,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전통사회의 예언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실제는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엮는 데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된다
아래비석은 계룡산에 있다
계룡산은 동학사와 갑사가 있는곳이다
계룡산은 높이는 845m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이라고 불린다.
신라 5악(五嶽) 가운데 하나로 백제 때 이미 계룡 또는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바다 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한국의 4대 명산으로 꼽혀 조선시대에는 이 산 기슭에 새로이 도읍지를 건설하려 했을 정도이다.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했으며 이러한 도참사상으로 인해 한때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성행했으나 종교정화운동으로 1984년 이후 모두 정리되었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 쥐라기·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차령산맥이 금강에 의해 침식되면서 형성된 잔구성 산지로서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뛰어나다. 노성천·구곡천·갑천·용수천 등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연평균기온은 11℃ 내외, 연강우량은 1,280mm이며 6~9월에 강우량의 90%가 집중된다.
각 봉우리 사이에는 7개의 계곡과 3개의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 1968년 12월 3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계룡팔경은 대표적인 관광명소인데 제1경은 천황봉의 일출, 제2경은 삼불봉의 설화(雪花), 제3경은 연천봉의 낙조(落照), 제4경은 관음봉의 한운(閑雲), 제5경은 동학사 계곡의 숲, 제6경은 갑사 계곡의 단풍, 제7경은 은선폭포, 제8경은 오누이탑의 명월(明月)을 가리킨다.
등산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동학사에서 오누이탑-금잔디고개-신흥암-용문폭포를 거쳐 갑사로 가거나 은선폭포-관음봉-연천봉을 거쳐 갑사로 가는 코스, 갑사에서 연천봉-고왕암을 거쳐 신원사로 가거나 동학사에서 은선폭포-관음봉-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가는 등 여러 코스가 있으며 대개 3~4시간이 소요된다.
이전에 산행을 하던 생각이 나는데 여기에는 22년이나 된 채력단련장이 있다
나무도 나이가 들어서 고목이 되었고 그때 만들었던 문화재나 조형물이 나이 만큼이나 세월의 때가 묻어 중후하다고할까
하였튼 먼진곳이다 그런 이곳에서 지인의 덕분에 라운딩을 즐기게 되었다
계룡산 산등선이 병풍처럼 쳐저 있었고 초가을 하늘은 높기만하다
구름도 뭉게구름이 둥실둥실이다
주변에는 미속촌처럼 주점이나 식당이 많았다
하지만 아침식사는 끝내 하지를 못하고 간단히 빵과 우유로 대신하였다
계룡산 입구의 식당 대문이다
유황오리집도 보이고 계룡산 자락이 보인다
저뒤에 나무를 찍은것이다 200년된 느티나무다 충청남도 기념수가 되었다
계롱돌탑이다
이쪽에서 보니 자태가 더 멋있다
5층석답이다
청솔모가 많다
우리가 가니 나무로 올라 살핀다 그리고는 다시 내려온다
다른 청솔모다
칠엽수란다 이름을 알고 싶었던 나무다 너도 밤나무와 비슷하다
서어나무다 이것도 많이 본나무로 느티나무와 비슷하다
공원처럼만들어졌는데 누군가의 산소있듯하다
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여인상이다 물이 흐른다
청솔모가 아주 많었다
정원처럼 잘 만들어져 있다
연자도 모이고 장독대도 보인다
우공이산이라는 비석이 보인다 산을 옴기려는 열성으로 임하라는 내용같다
저기 비석이 작게 보인다 절구통의 돌이 보인다
장감이심도신공덕비
아래 설명이 잘되어있었다 내용중에 계룡산이 도읍지가 되며 500년이나 이어간다고 적혀있다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가을이 성큼이다
아침이라 한가롭다 아침식사를 하려다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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