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율면 (한국시인협회12/2접수)
이천시라고 주소를 쓰기는 하지만
청미천 넘어 안성과 충북음성 오개면이 이웃하여
그들과 더 가깝게 지내는 곳
석원천괴 취천 세천의 주변으로
임금님표 이천쌀이 출렁이고 과일들이 방긋하여
풍요로움이 그득한 곳
임오산과 팔성산 아래는
돼지박물관에 축산업으로 꿀꿀 꼬꼬댁 노래소리
삼천의 면민이 어우러진곳
밤나무 많어서 밤밥으로
부모님 장수하게 만드신 효행이 습관이 되고
어재연* 장군 충성의 얼이 있는곳
이모산 팔성산 정기와
숙원천 취천 청미천 넓은 뜰의 민심은
후덕하고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 훈훈하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재연 장군 삼형재
조선 현종시 율면 산성리가 고향이며 프랑스 병인양요 전승과
미국의 신미양요시 전사하였으며 회령부사시 비적을 토벌하고 장시룰 만들어 무역을 활성화을 하기도 하였다
율면(栗面)을 아시나요
용인 안성을 거쳐 이쳔 설성과 장호원으로 흘러
충북 음성을거쳐 여강으로 흘러 남한강으로 가는
청미천 넘어의 율면은 경기도 이천시 끝자락에
이모산을 남쪽에 두고 북향이면서도 일조량이
해뜨고 해질때까지 가리지 않는 밤나무골 율면
동쪽에는 취천이 흐르고 감곡과 생극이 접하고
안방과 윗방이 도경계요 군, 면 경계로 총곡과 송곡리
서쪽으로는 석원천이 발원은 충북금왕과 삼성이라
이모산과 팔성산 계곡에 자리한 마을 음죽현의 마을
음성과 죽산이 이천으로 변하여 이천의 제주도라 한다
밤밥을 해드려 시어머니 병도 고친 효부의 이야기며
어재연장군 삼형제의 고향으로 생가도 있는 미을과
사시사철 농촌 체험마을이 있는 부래미마을도 있다
죽산의 본 근원인 본죽리의 임금님표 이천쌀중 으뜸
산수가 수려하고 옥토라 무엇이든 잘되는 율면이란다
경기도 이천의 끝자락 물건너 마을 율면을 아시나요
큰이모산 작은 이모산 팔성산을 끼고 돌고 도는
청미천 석원천 취천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내일도
사랑한다 좋아한다 감사합니다로 인사를 하는곳
여러분의 자녀들과 함께 부래미 마을로 모십니다
어재연 장군 생가는 이천시 율면 산성리
마지막 전투지는 강화도 광성보에 가면 얼이 보이고
어재연 삼형제의 투혼의 애국충정 되새김 해본다
여의도 사람들은 알것도 같은데 더 망가 트린다
이나라 어디로 가는걸까? 걱정일세
세상이 어둑하고 어려운 시기에
조선 현종 재임시 프랑스의 함대 친입 병인양요에
강화도 광선진읗 사수하기도 하고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강화도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서 미군과 대치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
시호는 충장(忠壯)이된 어재연 장군
경기도 이면서도 충청도가 고향이라고 사는 나
청미천 넘어 동떨어진 삼면이 개울인 밤나무 골
큰이모산과 팔성산을 등지고 남쪽이 산이면서도
하루종일 해가떠서 음달이 없이 해가 지는 마을
남이장군이 이모산 정상 마당바위에 오줌을 누어
무릎자리와 오줌자리가 파여 물이 고인곳도 있다
고약한 시어머니가 병들어 괴롭힘에 빨리 죽으라고
밤나무 독이 있다하여 밤을 매끼마다 밤에 드리니
의외로 시어머니 병도 낳고 장수하시어 효부되니
온 향리에 소문에 소문이 돌아 현감이 상을 내리니
동네 이름이 상율면 하율면이라고 불러다고 하네
이모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타면과 경계를 이루니
안성의 일죽과 이천의 설성 장호원읍경계가 되고
동쪽끝은 충북 감곡과 생극이 취천이 경계선이라
서쪽끝은 충북 금왕과 삼성이 경계로 충청도이고
남쪽에 자리한 팔성산 생극과 금왕의 경계의 율면
산성리넘어 임곡리 지천서원으로 수학을 하였다
산속에 초등학교가 있어 십오리길 너무 멀었다
가까운 충청도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단다
행정구역은 이천시 율면은 리마다 타면과 친하다
충청도 네개면과 경기도의 세개면이요 두개시다
어재연장군 형제들의 고향이요 생가가 자리한곳
부래미 농촌학습체험 마을이 사시사철 모이눈곳
삼천명의 향리 사람들의 인정이 넘치는곳 율면은
오늘도 청미천과 석원천 취천은 오늘도 흐른다
면적(㎢) 36.77
행정구분 24행정리(10법정리)
위치 경기도 이천시 남부 지도
행정관청 소재지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당로 132(고당리 241-5) 지도
북쪽으로 설성면(雪星面)·장호원읍, 서쪽으로 안성시 일죽면(一竹面), 남쪽으로 충북 음성군 금왕읍(金旺邑)·삼성면(三成面), 동쪽으로 음성군 감곡면(甘谷面)·생극면(笙極面)과 접한다.
북부와 서부에 충적층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 흑운모화강암과 반상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장암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동부의 경계지역에는 임오산(林烏山:341m)·팔성산(八星山:378m)이 있으며, 중서부는 낮은 구릉들이 형성되어 있다.
북부 경계선을 따라 청미천(淸渼川)이 흐르고, 남북으로 석원천(石院川)이 흘러 유역에 취락·경작지를 이룬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이며, 그밖에 콩·옥수수·잎담배의 생산도 활발하다. 남북으로 석원천을 따라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재로는 어재연장군 생가(魚在淵將軍生家:중요민속자료 127)가 있다.
경기도 이천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이다. 고당리 · 산성리 · 월포리 · 오성리 등 10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조선 시대 음죽현의 상율면과 하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율면과 하율면을 중심으로 충북 음성군 법왕면과 두의면 일부를 합쳐 율면이라 하고 고당리(高塘里)를 소재지로 삼아 10개 동리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에는 상율면과 하율면에 속한 여러 동리들과 관으로부터의 거리 및 편호, 남녀 인구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율 · 하율의 우리말 명칭은 위 · 아래 밤골인데 보통 주변 산지에 밤이나 호두나무(또는 추자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경우 붙여지는 이름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통의 나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산세를 경계로 상하가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가래산 또는 임오산(林五山)이 아닌가 한다. 우선 가래산은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추자나무와 관련된 것인데, 가래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추리(新楸里)는 본래 가래골 · 가래올 또는 추자곡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1872년지방지도』에서도 상율면과 하율면의 경계 부분에서 임오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산세를 경계로 동북쪽에 하율면(현재의 고당리 · 신추리 · 월포리 · 충곡리)이, 남서쪽에 상율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재연장군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용인(用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어재연장군 생가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어용선이 소유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돌안마을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뒤쪽으로 규모가 큰 소나무숲이 있다. 안채, 사랑채, 광채 모두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다.
광채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도 이때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집 앞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이 있고 일(一)자형 사랑채가 바깥마당과 접해 있다. 또 사랑방 뒤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집 형태의 안채가 집 안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잡고 있고, 안마당 동쪽에 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자집 형태를 이룬다. 각 건물들은 띄엄띄엄 여유 있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7칸으로, 양반 가옥답지 않게 퇴 없이 맞걸이 3량으로 처리하였다. 평면구성은 왼쪽에 부엌과 안방, 그리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 순으로 평이하게 배치되었다.
부엌과 안방, 대청은 모두 2칸이고 부엌광이나 골방은 따로 두지 않았다. 부엌 뒤쪽 칸에는 벽장과 다락을 설치하였다. 안방 뒷벽에는 헛기둥을 세워 반침을 달았고, 대청 위칸에는 뒷벽에 벽장을 만들었다. 구조는 맞걸이 3량이며 납도리집이다.
부엌의 지붕틀은 종도리에 맞춰 우미량을 처마도리까지 걸친 다음 위에 떡받침을 올려놓고 추녀머리를 얹었다. 초가(草家)인데 거의 박공집에 가깝다. 사랑채는 4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집으로, 평면구성은 서쪽으로부터 부엌, 구들, 대청 순이다. 나중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전후 퇴가 있는데, 앞퇴에는 구들과 대청 앞에만 조그만 쪽마루가 놓여 있고 뒤퇴에는 구들문 사이에만 쪽마루가 있다. 대청은 바깥마당과 동쪽으로는 터놓았고 안마당 쪽은 막혀 있다. 부엌 앞에는 앞퇴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뒤퇴는 양쪽 측벽을 막았다. 사랑 부엌은 안마당 쪽에서만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대문은 남쪽 측면에 만들었는데, 안마당 쪽 벽을 터서 꺾어져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고방(庫房)과의 사이에 돌담을 나지막하게 1칸 정도 연결해놓았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의 높이가 차이 나기 때문에 대문 앞 지대석에 몇 개의 자연석 계단을 만들어놓았다.
부래미마을 체험장
석산리 부래미마을은 대한민국 농촌체험의 중심지로 해마다 수많은 도시민들이 농촌의 신기함과 그리움을 찾아 방문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입니다.
봄에는 딸기수확, 가을에는 포도축제 등 4계절 다양한
농촌체험을 제공합니다. 또한 마을입구에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저수지와 다양한 예술작품 감상과 함께 황토염색체험과 도자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농촌체험, 학습, 세미나,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과 농촌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을 전시한 농기구 전시장, 생태공원 등이 있답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부래미 주민들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부래미마을홈페이지 (http://buraemi.invil.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