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張保皐 (메일온것을 저장한것임)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옮겨 편집
다른 이름은 궁복(弓福)·궁파(弓巴)이다.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 신무대왕과 염장과 궁파
제 45대 신무대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
왕은 당시의 협객 궁파에게 말했다
내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는데 네가 나를 위해 제거해 줄 수 있겠는가
왕위를 차지하면 네 딸을 데려다 왕비로 삼겠다.
궁파는 승낙했다. 그리고 협심동력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침범해 들어가 그 일을 잘 수행해 냈다
왕위를 찬탈한 뒤 신무왕은 궁파와의 약속대로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궁파는 미천한 사람입니다. 그 딸로 비를 삼으시겠다니 안될 일 입니다
왕은 대신들의 이 간언을 받아 들였다.
그때 궁파는 청해진(지금의 전남 완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신무왕이 전날의 약속을 어긴것에 원망을 품고 모반하려고 했다. 장군 염장閻長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불충한 일을 일으키려 합니다. 제가 가서 그를 제거하고 오겠습니다.
염장은 왕의 뜻을 받들고 청해진에 들어 왔다. 그리고 인도자를 통홰 궁파에게 알렸다.
내가 임금에게 한 원망이 있어 그대에게 신명을 보전하고자 하오
궁파가 듣고 크게 성냈다
너희들이 임금에게 충동질하여 내 딸을 폐해 놓고 어째서 나를 찾아 보려는 건가.
염장은 다시 알렸다
그것은 다른 중신들이 간한 것이지 나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소.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그제사 염장을 청사로 인도해 들이게 하고 그리고 물었다.
경은 왠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은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바 있어 그대의 막하에 몸을 던져 앞으로의 화를 면하려고 하오
궁파는 잘 되었다면서 술자리를 벌이고 무척 기뻐하였다.
염장은 궁파의 장검을 집어 들고 그를 베었다
궁파 휘하의 군사들은 놀라고 질려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복명했다.
궁파를 베었습니다
왕은 염장의 성공을 기뻐하며 그에게 상을 주고 아간벼슬을 내렸다.
※ 신무대왕의 궁파 암살은 비기사도정신이라 할 수 있다.
청부살해 - 궁파를 시켜 왕위찬탈
왕위찬탈 후 궁파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끝내는
염장을 시켜 암살해버리는 방법
모두 배신행위다
기사도나 무사정신이 지배했었던 유럽과 일본에서
배신을 가장 죄악시했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윤리가
무사도 정신에서 발생한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이다
◈ 염장閻長
무주(武州: 光州) 출생. 838년(민애왕 1) 장보고(張保皐) 휘하의 장군이 되어,
희강왕(僖康王)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閔哀王)의 군대와 싸워 이를 무찌르고,
839년 민애왕을 살해하여 우징(祐徵: 신무왕)을 임금으로 삼는데 공을 세웠다.
846년(문성왕 8) 청해진(靑海鎭: 莞島)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보고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술에 취한 그를 살해해서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아간(阿干)에 올랐다.
◈ 신라원新羅院
신라가 삼국통일하고 난 뒤부터 해외 교역활동이 활발해져 당과의 교통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으로 이주하여 산둥성[山東省]으로부터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집단적으로 살게 되었다.
그들의 집단거류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하였는데,
그 안에 세워진 절을 신라원이라고 불렀다.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있던 장보고(張保皐)에 의해 세워진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赤山院)이 유명하였는데
법화원은 재력을 갖춘 사찰로,
재당 신라인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법화원은 당시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이 절에는 신라의 승려는 물론 당승(唐僧) 및 일본에서 건너온 승려도 있었다고 한다.
◈ 적산 법화원 장보고기념비
중국 산둥성[山東省] 룽성시[榮成市] 스다오전[石島鎭]의 적산 법화원 터에 장보고의 업적을 기려 세운 기념비.
크기 높이 2 m, 90×130 cm.
제작연도 1990년 4월 1일
1990년 4월 1일 건립되었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희의 후원을 얻어 장보고의 옛 청해진(淸海鎭) 터인 전남 완도군민(莞島郡民) 대표들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820년 신라방(新羅坊)이었던 당시의 원덩현[文登縣] 적산촌에 세운 그의 본원사찰(本願寺刹)로, 845년의 회창법란(會昌法亂) 때 헐려서 황폐화한 것을, 이 절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을 기리는 일본측 관계자들의 협력을 받아 중국 당국이 중건하였으며, 중건과 때를 맞추어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장보고가 신라 ·당나라 ·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구법(求法)을 위해 법화원에 온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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