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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다(서토학자 손진기)

泉玟 김동석 2006. 10. 12. 10:44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다(서토학자 손진기)>

심양 동아연구중심의 손진기 씨가 쓴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논문을 우리말로 옮겨 올립니다. 중국에서 고구려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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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귀속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쟁의 초점
(關於高句麗歸屬問題的畿個爭議焦點)

-손진기(孫進己) 씀
-서길수(徐吉洙) 옮김


최근 몇 년 동안 역사에서 고구려가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가 각 국 학자들에 의해 치열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 논쟁은 조선(북한) 학자들이 먼저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학자들은 자신들의 논저에서 공개적으로 저희들의 관점을 천명하였는데 1979년에 출판된 {조선전사(朝鮮全史)}에 집대성되어 있다.

머나먼 원고시대(遠古時代)부터 조선반도와 지금의 중국 동북지구에 고대의 조선유형의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이 고대 조선유형의 사람들이 고조선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에 중국의 연(燕)이 조선의 요동(遼東)을 침입해 점령하였고, 기원전 2세기 중국의 한조(漢朝)가 조선반도의 북부를 침입하여 낙랑을 비롯한 군(郡)을 건립하였다.

기원 초, 원고대 조선의 고구려인이 흥성하여 낙랑군 및 요동군(遼東郡)의 한인(漢人) 세력을 축출하고 고조선이 잃어버렸던 땅을 수복하였다. 당(唐)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요동(遼東) 및 조선반도 북부를 점령하였다. 그 뒤 신라, 고려, 조선이 점차 반도의 북부를 수복하였고, 동시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동북지구를 수복하여 신라와 함께 조선의 남북조를 형성하였다.

지금은 비록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압록강과 도문강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지만,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지금의 동북지구를 중국이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해야 하는 숙원이 오래 동안 조선 인민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1993년 집안(集安)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토론회의에서 조선의 박시형 등은 또 우리나라(중국) 학자들이

'고구려는 우리 나라 북방 고대 민족이다'고 한 관점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며 '중국 학자들이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역사 속의 귀속으로 확정하였다. 이것은 역사성을 위반한 것이다'고 하였다.

당시 손진기(孫進己)는 "우리는 고구려를 중국의 영토라고 본다. 오늘의 국경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우리 나라 중앙 황조(皇朝)에 예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조선족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현재 중국의 각 민족에 속해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 뒤 한국의 어떤 학자는 신문잡지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를 "역사상 중국은 옛날부터 고구려가 중국에 속한다고 한 적이 없으며, 중국 학자들도 고구려가 중국에 귀속되었다는 관점을 주장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고구려가 중국 민족이라고 하니, 이는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이다"고 하였다.

사실, 7세기 초 수조(隋朝)의 배구(裴矩)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 주대(周代)에 와서 기자(箕子)에게 봉했고, 한세(漢世)는 삼군(三郡)으로 나뉘어졌으며, 진세(秦世)에 료동(遼東)을 통일하였다"고 하였다. 당대(唐代) 온언박(溫彦博)도 "요동 땅은 주대(周代)의 기자국(箕子國)이요, 한대(漢代)의 현토군입니다.

위(魏), 진(晉) 이전까지는 봉역(封域) 안에 가까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칭신(稱臣)하지 않으려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고, 요대(遼代) 소손녕(簫遜寧)이 왕씨 고려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신라이고 고구려는 우리 땅인데 너희 나라가 쳐들어와 점령하였다"고 하였으며, 20세기 40년대 김육불(金毓 )도

"이 때의 고려는 그 이전의 고구려이다. 고구려 일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와, 우리 중화민족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지금 동북 국경지방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새웠다"고 하였다. 그 뒤 손진기(孫進己)의 『동북민족사고(東北民族史稿)』, 장박천(張博泉) 등의『동북역대강역사(東北歷代疆域史)』, 담기양(譚其 )의『중국과 중국의 역대 강역(中國和中國歷代疆域)』, 장박천(張博泉)의『동북지방사고(東北地方史稿)』, 설홍(薛虹) 등의『중국동북통사(中國東北通史)』, 옹독건(翁獨健) 등의『중국민족관계사강(中國民族關係史綱)』, 왕중한(王仲翰) 등의『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는 모두 고구려족은 중국 고대의 한 민족이고 고구려국은 중국 고대의 한 지방정권이라고 보았다.

50년대 일부 학자들만 고구려를 조선의 고대국가로 인정하였고 수·당이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대외침략전쟁으로 인정하였다. 오랜 동안 계속된 논쟁을 통틀어서 매듭지어 보면 고구려 귀속문제에 관한 초점은 아래와 같다.

1. 고구려의 귀속은 어떠한 원칙으로 확정할 것인가?

조선학자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으로 고구려의 귀속을 확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상의 귀속으로 고구려가 조선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고구려가 조선에 속한다고 하는 주요 근거는 오늘날 조선이 조선반도의 북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상 조선반도 북부가 장기적으로 중국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살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상 일시적인 귀속을 가지고 장기적인 귀속을 부정하였고, 고구려의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고구려를 중국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로 확정하였으며, 고구려가 오랫동안 주로 중국 통일왕조 정권의 신하가 되어 복종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중국)는 일부 학자들이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역사상의 귀속을 확정하였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이 관점을 반대하였다. 담기양(譚其 ) 선생은 일찍이 [옛사람들이 말하는 '중국'을 역사상의 중국으로 인정하여서는 안 되며, 또한 오늘날 중국의 범위를 가지고 역사상 중국의 범위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역사시기, 몇 천년 동안의 역사 발전을 통해 자연히 형성된 중국을 역사상의 중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역사상 어떤 한 시기의 귀속이나 오늘날의 귀속만 가지고 판정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몇 천년 동안 내려온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어떻게 귀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상의 귀속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인데 만일 어떤 한 시기의 귀속을 가지고 각기 자기의 관점을 견지한다면 영원히 정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모든 역사에서 주로 어디에 귀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누가 정론을 부정하는가를 가려낼 수 있다.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런 원칙으로 고구려의 귀속을 연구하였고, 고구려가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중국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2. 고구려는 어느 나라 땅에 세워졌는가?

이것은 고구려 귀속문제 논쟁의 초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국내외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

첫 번째 관점 : 조선 역사학자의 관점.『조선전사』는 아래와 같이 본다.[고구려 국가를 세운 기본 주민은 고대 조선족의 한 가지인 맥족(貊族)으로, 기원전 8세기 고조선 변방인 혼강(渾江) 유역과 압록강(鴨綠江) 중류 일대에서 살아왔다],

[일찍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부터 이 지방에 졸본부여(卒本夫余)가 있었는데, 졸본부여(卒本夫余)는 고조선 옛 땅의 한 작은 나라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어느 곳에서 건국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이 지방에 수많은 고조선인이 살고있었다.] [고구려가 합병하여 고조선의 소국인 졸본부여(卒本夫余)가 된 것은 기원전 2세기쯤 발생한 역사사건으로, 그 당시 고구려는 이미 일찍이 고조선 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당당한 소국이 되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고조선의 실력 있는 지방정치세력, 즉후국(候國)이 되었다.]

두 번째 관점 : 고구려는 조선반도 북부에서 건립된 것으로 본다. 주환(朱 )이 주편한『세계중고사(世界中古史)』에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낙랑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고구려가 반도의 북부에 떨쳐 일어났다].

세 번째 관점 : 고구려는 집안(集安)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과 압록강 유역에 건립되었다고 보지만, 이 지역이 당시 어느 국가에 속해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네 번째 관점: 고구려는 우리 나라(중국) 영토에 건립된 것이라고 본다. 김육불(金毓 )은 일찍이 [고구려 일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와, 우리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었는데 오늘날 동북 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국가이다]고 보았다.

손진기(孫進己)의『동북민족사고(東北民族史稿)』에서는 [예맥족이 세운 부여국, 고구려국은 줄곧 한(漢)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우리 나라의 일부분에 속했다], [4세기 고구려가 한나라의 낙랑군을 빼앗은 뒤부터 조선반도의 한 나라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

서덕원(徐德源)은 [고구려인은 우리 나라 요동지방과 한·조 국경을 이룬 압록강 양쪽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맨 먼저 기씨(箕氏)조선에 속했고, 그 뒤 전국시기에는 중국 북방의 연국(燕國)에 귀속되었으며,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고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쌓자 고구려와 기씨조선은 모두 진(秦)나라의 요동으로 귀속되었다. 한나라 초기 고구려는 계속해서 중국 북방의 제후국인 연국(燕國)에 속했었다. 현토군이 조선반도 동북부에서 요동지구까지 물러나자 고구려인의 거주지역도 그 관할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상 몇 가지 관점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1) 맥족은 고대 조선족의 한 갈래가 아니며,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아직 통일된 조선족은 형성되지 않았다. 고구려를 세운 맥인은 당시 중국의 한 민족이었다. (2) 최초의 고구려 뿐 아니라 졸본부여는 모두 기씨조선의 소국이 아니었다.

중국 고대 문헌인『전국책(戰國策)』같은 것에 조선과 요동은 두 개가 함께 나타난 지명이고, 당시 조선은 요동을 점거하지 못했다.『일주서(逸周書)』에는 고구려의 선조 고이(高夷)가 예인(穢人)(지금의 길림 송화강 유역), 양이(良夷)(지금의 대동강 유역), 발인(發人)(지금의 요녕성 동북부)과 함께 나와있고, 주(周)의 신속(臣屬)으로 되어 있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는 [처음 연국(燕國)의 전성기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관리를 두고 국경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 요동외요(遼東外 )에 소속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동북 전역으로부터 조선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燕)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6국을 통일 한 뒤, 이 지역은 다시 진나라의 요동외요(遼東外 )에 속하였기 때문에 고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

다만 기원전 2세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기씨조선 영토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는 마침 효혜고후(孝惠高后)의 시대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요동태수는 곧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국경 밖 오랑캐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지 할 수 없도록 지키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君長)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듣고 천자는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주변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후한서} 동이전에 예와 옥저, 구려(句驪)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위만이 한나라의 위탁을 받아 그 지역을 관할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기원전 188년쯤부터 한나라가 위만에게 위탁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면서부터 기원전 128년 한나라가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관할하게 되는 60년간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위 졸본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의 소국이라는 설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고구려는 기원전 108년에 벌써 정식으로 한(漢)나라 현토군의 한 현이 되었고, 졸본부여(卒本夫余)도 한나라 현토군이 관할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러 고구려 5부를 통일하였다. 이것은 모두 당시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 즉 오늘의 중국 영토에서 진행된 것으로 오늘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두 번째 관점에서 [고구려는 낙랑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조선반도 북부에 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가 일어난 곳은 조선반도 북부가 아니고, 압록강 이북은 낙랑이 아니라 현토에 속한다.

세 번째 관점은 역사적 사실과 대체로 어긋나지 않지만, 고구려가 어느 나라 영토에서 건립되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관점 역시 명확하지 못하다.

오직 네 번째 관점만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데, 우리 나라에서 일찍이 비교적 정확한 관점이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관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개별적인 관점은 여전히 차이가 있다.

3. 고구려가 조선반도 북부를 차지하기 전, 당시 반도 북부는 어디에 속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조선 학자 및 우리 나라 대부분의 세계사 책에는 모두 이 지역은 당연히 조선에 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오늘날의 중조(中朝) 두 나라 국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반도 북부는 진(晉)의 낭랑군에 속했고, 그 이전은 한(漢), 위(魏)의 낙랑군에 속했고, 그 이전에는 한(漢)의 위씨(衛氏)조선에 속했고, 그 이전에는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 ), 주(周)와 연(燕)의 속국인 기씨(箕氏)조선이었다.

그 당시 조선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사람은 우리 나라 이인(夷人)의 한 갈래인 양이(良夷), 그 다음에는 상나라 기자(箕子), 그 다음 연(燕), 제(齊), 조(趙)의 망명자들이 낙랑군을 세운 뒤 이 지역은 한족(漢族)의 방언구(方言區) 가운데 하나로 변했다.

한(漢)나라 양웅(楊雄)이 지은 {방언(方言)』을 보면 [연(燕)의 동북 조선,열수(列水)(지금의 대동강 남부 재령강) 사이』를 한어(漢語)의 방언구로 보았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한인(漢人) 및 그 선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반도 북부가 오늘날의 조선 민족 거주지가 되고 오늘날 조선의 일부분으로 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가지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 된다. 게다가 당시는 중조(中朝) 두 나라 영토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우리는 과거 15세기에 건립한 이씨조선과 기원전 11세기에 건립한 기씨(箕氏)조선, 기원전 2세기에 건립한 위씨(衛氏)조선을 서로 혼동하고 있다. 이씨조선은 오늘날 조선족이 세운 조선으로 조선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이들은 민족 구성과 국가 귀속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고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쯤 세워진 고구려가 두 나라로 나뉘어 속할 수 없고, 5세기 전 고구려는 중국이고 5세기 후 고구려는 조선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나누는 것으로 당시 국경을 가지고 보면 5세기 전후 고구려는 모두 중국 영토에 있는 중국 지방정권이다.

4. 고구려국은 독립국가인가, 중국의 지방정권인가?

고구려국은 기원전 1세기에 건국하여 7세기 멸망에 이르기까지 800년 모두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조선 학자는 900년 역사라고도 한다. 조선 학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고구려는 시종 독립적인 국가로서 조선 역사 속의 국가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구려국이 존재한 전체 역사를 보면 고구려는 주로 중국 역대 중앙정권의 지방정권에 속했기 때문에 할거(割據, 이른바 독립)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고구려가 처음 정권을 세운 것은 서한(西漢) 때이다. 주몽이 기원전 1세기에 고구려국을 건립하기 이전, 기원전 2세기에 이미 고구려는 당시 중국 한조(漢朝)의 현토군 고구려현에 속해 있었다.

동한(東漢) 180년간 고구려와 동한 사이에 비록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10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은 모두 동한(東漢) 왕조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다.

220∼426년 사이에 우리 나라 북방 여러 민족 사이에 할거(割據)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고구려도 할거전쟁에 참가하여 당시 우리 나라의 지방할거정권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고구려는) 계속 당시 우리 나라 중앙정권과 신하로 예속되는 관계(臣附關係)를 유지하였다. 게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고구려후, 고구려왕, 정동대장군, 영주사사(營州刺史), 낙랑군공(樂浪郡公), 낙안군공(樂安郡公) 같은 관직을 받았다.

남북조시기 고구려는 여러 해 계속하여 당시 중국의 북위, 북제 및 남조 의 각 나라 정권에 공물을 바쳤고, 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북위, 북제 및 남조 역대에서 내린 고구려왕,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요동군공(遼海郡公), 영호동이중랑장(領 東夷中郞將), 산기상시(散騎常侍), 동이교위(東夷校尉),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같은 관작과 직무를 받았다.

수·당 때 고구려와 수·당 왕조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지만 모두 해 보았자 십 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며, 그 뒤 70년 남짓 고구려는 계속 수·당에 신하로서 예속되어(臣屬) 있었고, 수·당이 내린 관직을 받았다.전체 역사과정을 통해 보면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민족정권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전 역사 기간 동안 중국에 귀속되었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5. 고구려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민족인가? 조선 역사 속의 한 민족인가?

오랫동안 조선 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이 조선 역사 속의 한 민족이며, 고구려 민족의 후예가 바로 오늘날의 조선족이라고 본다. 또한 고구려 민족이 남긴 문화유적을 조선 민족이 만든 역사유적으로 보고, 심지어는 그곳에 가서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중국의 학자와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 학자들은 이미 근거가 충분한 사실을 바탕으로 연구하여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민족의 후예들이 일부는 중원으로 옮겨가고, 일부는 돌궐로 투항해 가고, 일부는 발해로 들어갔으며, 그 뒤 모두 중국 각 종족에 융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만 당시 신라에 귀속되었으며, 그 뒤 또 작은 수의 고구려인이 당과 발해에서 신라로 돌아갔는데, 이러한 고구려인들은 그 뒤 오늘날의 조선족에 융화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구려인의 후예는 주로 우리 나라 각 민족에 있지 조선 학자들이 말하듯 그 후예가 오늘날의 조선족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 조선족의 선조는 주로 고대의 삼한(三韓), 즉 신라에서 온 것이며, 상당수는 조선반도로 옮겨간 중국 각 종족도 들어있다. 오늘날 조선족 가운데 진짜 고구려의 후예에 속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오늘날 집안(集安)과 환인(桓仁)에 가서 선조의 유적에 엎드려 절하는 수많은 조선족들도 만일 그들의 족보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대부분 고구려인의 후예가 아닐 것이며,

진짜 고구려인에서 기원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렇게 찾아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족이고 또 그렇게 말하는데, 모두 사람들의 놀림을 받으며, 남의 선조를 자기의 선조로 만들어 경배를 하는 것이다.

6. 수·당이 고구려를 치는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인가? 조선에 대한 침략인가?

수·당이 고구려를 치는 전쟁의 성격에 대하여 조선 사학계에서는 중국이 조선을 침략했다고 보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조선전사』는 수·당과 고구려가 벌인 전쟁을 모두 침략으로 규정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에서 조기에 출판된 중국사 책들까지도 천편일률로 모두 대외침략전쟁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 학술계의 관점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를 들면 상월(尙鉞)의『중국역사강요(中國歷史綱要)』에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 침략이다]고 했고, 범문란(範文瀾)의『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도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은 '침략'으로 명확하게 하고, 수나라와 토곡혼(吐谷渾)과의 전쟁을 '개변(開邊, 변방개척)'이라고 구별하였다.

동북사에 관한 저작 가운데 이와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은 다음과 같다. 김육불(金毓 )의『동북통사(東北通史)』는 [수(隋)가 고구려를 친 것은 요동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았고, 손진기(孫進己)의『동북민족사고(東北民族史稿)』는 [고구려와 수·당의 모순은 지방할거세력과 우리 중앙정권의 모순이다]고 하였으며, 1990년에 출판된 옹독건(翁獨健) 주필의『중국민족관계사강요(中國民族關係史綱要)』에도 [고구려는 우리 나라 역사에 나타난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대외'침략'이라고 써서는 안되고 '정토(征討)'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전쟁의 성질에 대한 명확한 토론은 없었다.
현재 우리 나라 사학계는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요동을 수복하는 전쟁이라고 보고 대체로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요동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이고 한족의 거주지역이기 때문에 국가관계로 보나 민족관계로 보나 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중국의 한 민족이라고 셈치더라도 예로부터 줄곧 한족의 거주지인 요동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고, 고구려가 2백년 동안 요동을 점령한 뒤 수·당이 이를 수복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현재 수·당이 평양을 친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견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중·조 국경을 가지고 본다면 수·당이 고구려를 치고 평양에 이른 것은 압록강을 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상의 국경을 가지고 보면 고구려가 반도 북부를 차지한 것은 4세기초로서 약 3백년쯤 되는 기간이지만, 그 이전 낙랑군의 역사가 4백이 넘고, 기씨조선, 위씨조선을 한족(漢族) 선조의 정권으로 본다면 천년이 된다. 고구려가 중국 민족에 속한 것과 관계없이 반도의 북부를 점령했다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토지를 쳐들어와 점령한 것으로 봐야 하며, 중국의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쳐서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상은 국내 민족모순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국제관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역사상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은 근본적으로 무슨 대외침략전쟁 같은 것이 아니고, 역사상 우리 나라 국내 민족간 전쟁으로 봐야 한다.

『조선전사』에서 [고구려가 고조선을 위해 낙랑군 손안에 들어있는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이다]고 한 관점은 도리에 맞지 않다. 고구려인은 고조선의 후대가 아니기 때문에 고조선인 대신 잃어버린 땅을 수복할 권리가 없다. 만약 고조선인과 낙랑인이 모두 한족이고 그 선조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漢)이 위씨조선을 멸하는 것은 중국 국내에서 같은 민족 내부의 통일전쟁이고, 고구려가 낙랑군을 차지한 것은 중국 국내에서 다른 민족간의 침범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조선인이 반도의 북부를 침략하여 점거(侵占)하고 있는 사실과 관계없이 한(漢)이 위씨조선을,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을 고대 중국이 조선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절대 반대한다.

7. 왕씨 고려는 고씨(高氏) 고려의 계승자인가?

조선 학자들은 모두 왕씨 고려는 위씨(衛氏) 고려의 계승국이라고 본다. 일찍이 고려시대 고려인 서희(徐熙)가 이미 이런 주장을 했고,『송사(宋史)』도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오늘날에 와서도 이런 잘못된 관점을 상당히 많이 답습하고 있다. 이것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를 현재 조선의 역사 속에 있던 옛 나라라고 잘못 알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다른 귀속(歸屬), 다른 민족의 국가로서 왕씨고려는 조선 역사 속에 있는 국가이며 오늘날의 조선족 선조가 건립한 것이다. 고씨고려는 중국 역사 속에 있는 국가로서 대체로 오늘날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모두 고려라고 불렀기 때문에 같은 나라로 잘 못 알게 된 것이다.

김육불(金毓 )의『동북통사(東北通史)』에서 그 잘 못을 잘 지적해 주었는데, [이 때의 고려는 바로 전대의 고구려(高句驪)다. 고구려 일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와 우리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다. (고구려가)나라를 세운 것은 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뒤에 들어선 왕씨고려와 이씨조선과는 다른 종족이며 근원도 다르다]고 지적해 냈다.

손진기(孫進己)는 [고려 화폐에 대한 몇 가지 문제]란 논문에서 두 가지 차이를 논술하였다. [고구려는 오랫동안 우리 나라 영토에 있던 한 지방정권이었다] [왕씨고려는 순수하게 오늘날 조선반도에 세워진 고대 국가이다. 고씨고려와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며 두 나라는 또한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없다. 과거의 사서에 두 고려를 한데 잇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송사(宋史)} 외국전, 고려조에 '고려는 본래 고구려를 말한다.

……長興中, 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高氏)의 위(位)를 이어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왕씨고려는 고구려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왕건(王建)은 신라 장군으로서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했다. 왕건(王建)은 신라 김씨 계통이지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왕씨의 고려는 오늘날의 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대동강 이남을 차지했는데, 옛 신라의 땅을 후기에 고려가 점령한 것이다. 그 땅은 당(唐)이 고구려를 멸한 뒤 신라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왕씨고려는 신라 옛 땅에 세운 것이지 고씨 고려의 옛 땅에다 건국한 것은 아니다.

두 나라의 민족 성분도 다르다. 왕씨 고려의 민족 성분은 고구려인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고, 왕씨는 낙랑(樂浪) 한(漢)의 성씨다. 왕씨고려는 신라인,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漢人) 후예들이 세운 것이다.

8. 역사상 중국이 조선의 영토를 쳐들어가 점령하였는가?
아니면 조선이 원래 중국의 영토를 점유하였는가?

조선 사학가들은 중국이 조선을 끊임없이 침략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연(燕)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 한(漢)이 위씨조선을 멸한 것, 당(唐)이 고구려를 멸한 것을 가지고, 모두 중국 역사에서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연(燕)이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땅을 차지한 역사가 조선에 속하는가? 위씨조선은 중국의 이민정권인가, 아니면 조선 역사의 정권인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지방정권인가. 조선 역사의 한 국가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문제를 분명히 하기 전에는 침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기씨조선은 상(商)의 귀족 기자(箕子)가 현지의 양이(郞夷)를 바탕으로 하여 세웠는데, 그 뒤 주나라의 봉함을 받고 주나라에 입조(入朝)했으며, 오랫동안 스스로 주나라의 제후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뒤 연(燕)이 통치하였는데 연나라는 이미 그 땅에 관리를 두고 변방요새(障塞)를 쌓았다.

그 후대는 대부분 위씨조선으로 들어갔다. 위씨조선은 중국의 연(燕)나라 사람과 제(齊), 조(趙)에서 온 이민들이 위씨조선의 기초 위에 세운 것이다. 건립 초기부터 한(漢)의 외신(外臣)으로 자인했다. 100년도 못 가 위씨조선은 한(漢)에게 멸망하고 낙랑군이 세워졌다. 중국의 낙랑군(樂浪郡)은 선후 500년 가까이 존재하였으며, 이 지역의 민족은 일찍이 한족의 한 부분이 되었다.

고구려는 원래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 ) 및 한(漢)의 현토군 관할 범위 안에 있던 민족으로 4, 5세기에 낙랑군과 요동군 땅을 점유하였다.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한 지방정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모두 중국 내부의 일로서 근본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이란 성립될 수 없다.

오늘날의 조선족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거주한 사람에서 비롯되었는데, 발전을 이룩한 신라인을 핵심으로 해서 형성되었다. 그 귀 신라, 왕씨고려, 이씨조선이 점차 북으로 확장하였다. 당(唐)이 신라에게 패강(浿江, 현재의 대동강) 이남지역을 떼어 주었고, 그 뒤 료(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떼어 주었다.

명나라 때 또 오늘의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중조국경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중조국경은 비록 조선족이 끊임없이 북쪽으로 확장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당시 중국 여러 왕조의 정부가 동의를 거친 것이다.

이 지역 또한 중조 두 나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오늘날 조선 및 한국의 학자들은 따른 속셈을 가지고 오랜 역사 속의 민족과 정권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쟁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조선의 것이라고 엉뚱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파괴하는 무리한 요구이다.

만일 세계 각국이 모두 1000년 전 역사 분쟁을 가지고 오늘의 국경을 새로 논증하려 한다면 장차 세계적인 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모두 지금의 중조 두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적 국경을 승인한다. 다만 일부 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따른 속셈을 가지고 중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하는 관점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박하여야 하며, 그들의 감추어진 나쁜 계략을 폭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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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 중국에서 추진중인 고구려사 중국사 편입작업에 따른 이론적 방향의 기초모델로 이미 제시되어진 논문입니다. 지난해 7월부터 발표된 70여편의 논문에 대한 성격의 일단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 됍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불멸의 마고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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