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문학/관광지와 유명한곳

이천과 율면 임오산

泉玟 김동석 2012. 2. 23. 02:38

경기도 이천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이다. 고당리 · 산성리 · 월포리 · 오성리 등 10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조선 시대 음죽현의 상율면과 하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율면과 하율면을 중심으로 충북 음성군 법왕면과 두의면 일부를 합쳐 율면이라 하고 고당리(高塘里)를 소재지로 삼아 10개 동리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에는 상율면과 하율면에 속한 여러 동리들과 관으로부터의 거리 및 편호, 남녀 인구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율 · 하율의 우리말 명칭은 위 · 아래 밤골인데 보통 주변 산지에 밤이나 호두나무(또는 추자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경우 붙여지는 이름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통의 나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산세를 경계로 상하가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가래산 또는 임오산(林五山)이 아닌가 한다. 우선 가래산은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추자나무와 관련된 것인데, 가래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추리(新楸里)는 본래 가래골 · 가래올 또는 추자곡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1872년지방지도』에서도 상율면과 하율면의 경계 부분에서 임오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산세를 경계로 동북쪽에 하율면(현재의 고당리 · 신추리 · 월포리 · 충곡리)이, 남서쪽에 상율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시의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39m). 율면과 음성군 생극면에 걸쳐 있다. 산의 모양새가 까마귀가 송장을 파먹는 형상이라 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임오산(林烏山)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또 산중에 임오탁시형(林烏琢尸形)의 명당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임오산(林梧山)이라는 다른 한자 표기도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 자다보니 어느새 이곳에 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임오산을 중심으로 월포리와 총곡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고당리까지 산세가 펼쳐져 있는데. 고당리에는 이 마을에서 3~4대까지 오래 살며 재산을 모으면 모아 둔 재산을 모두 잃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풍수상 행주형(行舟形)의 형국과 관련된 것이다. 즉, 임오산 자락에 매어 있는 고당리는 청미천을 따라 막 떠나가려 하는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배에 짐을 많이 실으면 가라앉는다는 풍수적 소응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당리에서는 임오산 옹달샘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충청북도 음성군의 생극면 송곡리에 있는 산이다(고도:339m). 북쪽의 이천시 장호원읍 백족산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 팔성산 · 마이산 · 덕성산 등으로 연결된다. 모두 차령산맥에 속하는 산이다. 조선 시대 충주 관련 문헌이나 고지도에서 임오산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1872년지방지도』(음죽)(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과 율면 일대)에 송오산(宋五山) 표기가 있는데 지금의 임오산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에 송오산 서쪽으로 팔성산(생극면 팔성리 소재)이 그리고 북쪽으로 백족산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여지도서』(충주)에 '임오치(林烏峙)'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의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고개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형도』에는 생극면 북서쪽에 임오산이 나타나고 산의 남쪽사면에 임오리가 있다.

 

어재연 생가

중요민속자료 제127호. 어재연은 고종 때의 무관으로 1871년(고종 8) 미국 로저스(Rodgers,J)제독이 지휘하는 군함과 광성진(廣城鎭)에서 격돌하다가 아우 재순과 함께 전사하였다.

후손들은 이 집이 그의 생가라고 주장하므로 적어도 1820년대 초엽에는 창건되었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나 오래되었다고 하는 안채도 200년 가까이 된 집으로는 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뒤에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집은 뒷산자락이 다소곳이 내려온 터에 북서향으로 앉았다.

이 지역의 {{#0154}}형의 평면이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는 데 비하여 이 집은 {{#063}}형의 안채에 一자형의 뜰아래채와 사랑채가 {{#151}}형으로 포치되는 또다른 배설법(排設法)을 보였다. 이는 원형이라기보다는 중간에 중건되면서 변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은 뜰아래채에 있다. 2칸통 4칸의 평면 중에서 북쪽 첫 칸 좌측 1칸을 대문간으로 삼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이엉을 이은 낮은 담이 있는데 이는 내외담이 되는 셈이다. 방과 마루를 제외하고는 곳간으로 구조되어 있다. 뜰아래채에 이어 사랑채가 있다.

뜰아래채와 사랑채 사이의 틈 사이에는 낮은 담장을 쌓아 막았다. 사랑채는 사랑방 2칸과 대청 1칸 그리고 아궁이가 있는 반 칸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앞뒤로 툇간이 있다. 이 부분은 원래 없었던 것을 덧달아낸 것이다.

사랑채에 이어 동편으로 헛간이 계속되고 그 끝에서 낮은 담장이 시작된다. 이 담은 측간까지의 사이에 쌓여 있는데 측간은 슬레이트를 이은 흙벽돌집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안채는 7칸의 {{#063}}형이다. 사랑채 쪽의 2칸이 부엌이며, 이어 안방도 2칸인데 뒤쪽으로 반반칸의 벽장을 만들어 개흘레를 삼았다. 꺾이면서 2칸의 대청이 있다.

건넌방 쪽 대청 뒷벽으로는 고미벽장을 만들었다. 건넌방은 단칸으로 뜰아래채 쪽에 있다. 툇마루나 쪽마루가 방 앞에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최근에 안방문 앞에 널빤지 한쪽을 걸어주어 딛고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대청 앞쪽에 유리 미닫이를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하게 하였으니, 변형된 모습이다.

부엌의 널문 아래에 문지방이 없고 문인방 위를 열어 통풍을 의도하고 부뚜막 위쪽으로 광창을 내었다. 광창이 설비된 중방에 의지하여 다락이 구성되었는데 안방 아랫목에서 올라갈 수 있게 마련되어 있다. 안채·뜰아래채·사랑채 등은 이엉을 이은 초가인데 지붕구성에는 별다른 특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