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문학
詩人의 詩論*
시인은 시만으로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감추어진 신비스러움을 들려줘야한다 시인에겐 詩 그것보다 더 이상의 가치 있는 예술과 삶이 없으며, 시 그것만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구성되어지기 때문이다.
시를 최고위의 예술로 대우하고자 하는 순수한 심정과 사유에 근거한다. 그런데도 왜 시인은 간간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설을 시도하고 또 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인가? 더구나 그러한 시도와 노력이 처음부터 몇 가지 함정을 포함하고 있을 바에야……
그 함정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부끄럽게도 노출하고 있는바 그들이 논리적 훈련을 거치지 못한 탓으로 숱한 惡文과 誤文을 뻔뻔스럽게 기술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킨다는 점이다. 둘째는 하나의 가정으로서, 만약 한 시인의 산문이 그의 시 작품보다 예술적 향취를 더 띤다거나 또는 전문적인 비평가의 평문보다 더 설득력 있는 논리적인 글이라면 그는 이미 시인이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문학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산문의 형식을 통하여 시에 대한 그의 思惟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기동일성의 지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에 있어 시인에 대한 시의 반성이기도 하다. 사실 시는 사유보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느니만큼, 사유 그것의 넓이와 폭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산문이 시 그것에 못지않게 시인에게 요구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시만을 쓰는 게 어떤 점에서는 이상적이면서도 또 시 그것에 대한 사고를 개진한다는 것이 자칫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같이 위험하면서도 그가 예술과 삶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시인이면 시인일수록 그는 필연적으로 시를 위한 산문의 이론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급의 시인을 동시에 1급의 비평가이다’라는 통설을 자연스럽게 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수 있게 된다. 보들레르, 발레리, 엘리어트, 또 가까이는 金起林의 이름을 들추어 낼 것도 없이 ,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그에 못지않게 시에 대하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의 운명에 대하여, 고심하고 사고하고 그리하여 각자의 특유한 스타일로 그것을 펼쳐 보임으로써 새로운 시론의 지평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金洙暎의 『詩여, 침을 뱉어라』와 鄭玄宗의 『날자, 우울한 靈魂이여』가 갖는 의의는 저자 자신들이 다 같이 시인이라는 점에 있으며, 또 강조되어야 할 것은 김수영은 60년대에서, 정현종은 70년대 오늘날에 있어서 각기 주목되는 시인이면서도 그들의 시작품과 또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론이 서로 이질적인 스타일과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평가태도를 매우 흥미롭게 유도시킨다는 점이다.
김수영 그는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처절한 시를 쓰고 처절한 시론만을 주장했던 것이다.
김수영이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치기까지 지식인(시인)의 무력함과 통분어린 좌절감을 유발해야 했던 불행한 시대의식이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정직함을 대변해 주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의 시에 어떻게 플러스했는가 하는 점만이 단지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역시 비평은 나에게는 영원히 분에 겨운 남의 일이다’라고 겸양적으로 술회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비평적 태도를 고수하고 그것이 주의·주장에 열렬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써 우선하기를 다짐했으며 또 그것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공언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同書 p.122).
김수영에 의하면 가장 매도해야 할 것은 문화적 쇄국주의와 그 속에서 번식되고 있는 부르조아 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예술을 고뇌의 대가로 쟁취하고자 하는 시인적인 양심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불가피하게 직선적인 사고만을 추출케 하고 그 결과 본시 복합적인 구조를 지닌 시가 아주 적당하고 단순하게 사상되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의 책임을 전적으로 언론의 책임으로 돌리게 된다. ‘언론의 자유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천재의 출현을 매장하는 하늘과 땅 사이만한 죄를 범하고 있다.’(同書, p.65). 그것은 그가 몸 전체로 느낀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열렬히 부르짖는 문화적 자유란 대체 어떠한 것을 말함인가?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 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 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知識人의 社會參與」중에서, (同書 p.81)
우리는 이 말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로 서글프게 매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대다수의 문필가들은 일찍이 김수영이 체험하고 고심했던 표현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의 시를 통해서이건, 시론을 통해서이건 할 말을 결국 다 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최고의 문화 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라는 말은 일견 지극히 타당한 듯하나 현실적으로는 지나친 이상에 불과하다. 이 말은 결코 자유의 억압과 표현의 한계를 정치적 의미에서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상된 김수영의 참여시론이 문화적 차원에 도달되는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일 것이다. 그 스스로 한탄하고 있는 ‘우리 시단의 참여시의 후진성’(同書, p.75)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문화적 개방주의를 위한 모색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점에 그의 새로운 면이 있다. 그는 루카치나 하우저류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무장하여 민중의 비참한 삶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쇠퇴해 가는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주장한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말을 인용하며 아주 주밀하게 조직화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시인의 무력화 현상이 불가피하다고 탄식하는 것이 그 첫째이며, 또 나머지 하나는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는 예술의 무가치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 붓을 드는 손보다도 삽을 드는 손이 한결 다정하다. (同書,p.68)
김수영은 그의 평문 도처에서 같은 논지를 반복 전개하고 있다. 그의 논지의 일단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우리 문학에 있어서 언제 어떻게 발화하게 될지 모를 도화선을 글 쓰는 사람들의 의식 깊숙이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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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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