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는 거기가 거기
다도해 남해안에 섬중에 제일큰곳
한산섬 달밤만큼 휘황항 거제도에
거제교 신거제대교와 부산의 가거대교
섬이라 하기에는 육지와 같아서는
큰도로 따라서면 장대한 고층건물
육지의 내음 같아서 평온이 깃드는데
해안선 장승포항 따라서 구비구비
바다와 해금강에 기암석 병풍치고
깃발에 온세상 향해 여기만 하냐란다
선착장 출항하는 유람선 관광객들
조선소 장사진에 거북선 살아나고
팔색조 해조음으로 동백숲 몽돌해변
통영과 어우러진 화려한 한려수도
부산이 지척이니 거기가 거기라우
거제가 수용소라고 하던때 옛날일세
면적(㎢) 401.53
행정구분 9면 10행정동(14법정동)
꽃 동백
나무 해송
새 갈매기
인구(명) 257,669(2014년)
개요
거제도는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남해안의 섬 중에 가장 크고 넓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하지만 그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려면, 적잖은 다리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강 다리만 한 신거제대교를 건너고, 고속도로처럼 시원스레 뚫린 국도를 한참동안 달려도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시가지와,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조선소만 잇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승포항을 지나면 전혀 다른 거제도에 들어선다.
우선 길부터가 다르다. 해안선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레 구부러지고 오르내리는 2차선 도로로 바뀐다. 그리고 장승포항에서 거제 해금강까지의 칠십리 길은 줄곧 전망 좋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데, 이 길가에는 팔색조가 깃드는 동백숲과 맑은 해조음으로 귀를 씻어주는 몽돌해변이 자리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거제도의 대표적인 절경은 역시 해금강이다. 면적은 0.1㎢ 에 불과하고 전체가 깎아지른 기암절벽의 무인도지만 섬 머리께의 울창한 숲과 절벽아래의 해식동굴이 북녘 해금강에 못지 않은 절경으로 소문나 있다.
동부 해안의 선착장에서 출항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으면 이곳 해금강의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해금강은 훤한 대낮보다도 동틀녘이나 달밤에 더 운치있고, 뭍에서 바라보는 해금강은 뱃전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맨 남쪽의 무지개마을과 여차마을 간에는 그림같은 해안절경과 환상적인 드라이브코스가 감춰져 있다. 남해안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보다 풍광좋은 해안도로를 만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여차마을의 몽돌해변은 여름철에 해수욕과 야영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장승포항의 남동쪽 바다에 떠 있는 지심도는, 남해안의 여러 동백섬 중 가장 아름답다. 길이 1.5㎞, 너비 500m의 섬이 온통 동백나무로 덮여 있어 해마다 3월경이면 섬뜩할 만큼 아리땁고 요염한 동백꽃이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인다.
외도해상농원은 오늘날 거제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이다. 155,372m²(47,000평) 규모의 농원 안에는 3,000여 종이나 되는 식물들이 있는데, 대부분 이름조차 생소한 외국식물들이다. 또한 모든 건물들이 지중해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거제도를 여행하기에는 동백꽃 피는 3월경이 가장 제격이다. 그 즈음에는 남부면과 일운면을 지나는 14번 국도 주변의 바닷가와 산자락마다 진달래·복사꽃·산벚꽃도 화사하게 피어난다. 또한 길 사정도 여유롭고 바다의 빛깔도 짙푸른 쪽빛이라 섬다운 풍정을 느낄 수 있다.
자연환경
이 섬은 일부의 화강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신라통의 지질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봉은 섬의 남단에 가라산(加羅山, 580m)·천장산(天長山, 276m), 동쪽에는 옥녀봉(玉女峰, 555m), 북쪽에는 대봉산(大峰山, 258m)·대금산(大錦山, 438m) 등이 있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여 지세포·장승포·옥포·율포·죽림포 등의 수많은 작은 만과 양지암각·수제봉·색암말 등의 돌출부가 많다. 북쪽과 동쪽 해안은 대체로 험준한 해식애로 되어 있고, 남쪽과 서쪽 해안은 비교적 낮은 저지를 이룬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겨울에도 기온이 빙점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으며, 또 여름에는 25℃ 내외로서 피한·피서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곳이다. 연평균기온 13.7℃, 1월 평균기온 4.3℃,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강수량은 1,726㎜이다. 소철·종려나무·석란·풍란·팔손이나무·동백나무 등 아열대식물이 자란다.
현황
경지면적은 7,062㏊, 논 4,495㏊, 밭 2,567㏊이다. 거제도의 남부 일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특히, 섬의 동남부 와룡반도와 운곶반도 사이의 도장포만 일대에 자리잡은 명승인 해금강(海金剛)은 천태만상의 기암과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어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해당화로 유명한 명사백사장, 국사봉장관대·동백터널·지심도·옥포대승첩기념탑·지성관 등 관광명소가 있다. 예전에는 육지와의 연락이 불편하였으나 1971년 통영반도와 거제도 간의 견내량해협에 거제대교(길이 740m)가 가설됨으로써 육계화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그리고 2010년 12월 14일 부산광역시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거제도의 교통 여건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부산에서 거제도까지의 거리가 기존 140㎞에서 60㎞로 단축됨으로써 소요시간도 2시간 10분에서 50분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유류비와 물류비용이 크게 절감되고 관광산업 발전의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6개 교, 분교 11개 교, 중학교 16개 교, 고등학교 7개 교와 전문대학 1개 교가 있다. 1973년부터 옥포만과 신현읍에 대형조선소가 건설되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조선공업지역이 되었다.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7.14(음)~1967.2.13)을 생각하면 먼저 ‘통영’과 ‘우체국’을 떠올리게 된다. 통영에서 자란청마의 ‘우편국에서’라는 시는 아마도 통영에 있는 한 작은 우체국에서 비롯된 시일 것이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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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갯비린내가 밀려왔다. 아마도 시인은 거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의 과정에서 시를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의 빛을 비추기도 했지만,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였던 것이다.
청마의 가장 널리 알려진 연모의 대상은 시조시인 이영도이다. 청마는 1946년께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죽순(竹筍)> 동인을 했다. 대구 서문로에서 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 자로 해방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해 11월이 다 저물 무렵 명금당에 나타난 청마는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청마가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다. “쉬이 잊으리라 / 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낳기도 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지만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 나르는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分類學者)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시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깃발’이다. 그 ‘깃발’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램을 남겼다.
유치환은 1908년한의(韓醫)였던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유치환은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의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 시절 더욱 심화하였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때 잔학한 일본인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가 바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 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詩作)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 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趙碧岩)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素雲), 지용(芝溶), 이상(李箱)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 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냈다. 다방에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게 없고 유치원에 있는 아내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유치원 보모이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여주었다.
청마의 첫시집 [청마시초]가 나온 것은 1939년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구본웅(具本雄)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창문사(彰文社)에서 찍어냈는데, 시집 표지에는 <청색지사(靑色紙社)>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혀 있다. 시집의 제호는 김소운의 의견을 따른 것이고, 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했다.
청마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난 것은 1940년 봄의 일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때여서 너나 할 것 없이 궁핍했던 시절이다. 하얼빈에서도 마차로 하루 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연수현(煙首縣)이라는 곳이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그 소도시의 네거리에는 효수당한 비적(匪賊)의 머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 걸려 있었는지 말라서 소년의 얼굴처럼 작고 검푸렀다. 흑룡강(헤이룽강)에서부터 불어온 황량한 바람이 그 비적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곳에 가형(家兄)인 동랑 유치진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 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다. 이듬해 자금 융통이 필요했던 청마는 귀국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베일 듯 추웠고, 대기를 부옇게 지우며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에 청마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는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의 광막한 벌판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였다.
청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향하는데, 그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 달 뒤에 해방되었다.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청마는 ‘유(柳)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방 집어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강습, 시민상식 강좌, 농촌 계몽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단체였다.
청마는 교육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다. 1954년에 안의중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그 뒤로 경주중고등학교, 경주여중고, 대구여고, 경남여고 등의 교장을 지냈다.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에는 자유당의 정책에 잘 따르지 않던 청마는 한때 미움을 사서 교장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마는 학생들로부터 단단한 신임과 함께 인기가 높았던 교장이었다. 전근 발령이 날 때마다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학생들이 유임 데모를 벌이곤 했다.
그 뒤 청마는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자리를 얻어 시론을 강의했다. 청마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방안에 있던 잉크병이 얼기도 했다. 이때 경북대 의대를 나온 문학청년 허만하(許萬夏)는 혼자 청마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1960년 이른 봄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부근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청마의 집을 방문했다.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 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볕이 따뜻했던 그날 마루 끝에 걸터앉은 허만하는 얘기 끝에 청마에게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라고 묻자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라고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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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기념관의 시비 <출처: (cc) Kang Byeong Kee at ko.wikipedia.org>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면은 너는 오늘 이 시간까지를 진실로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며 또한 살아있는지, 천 길 벼랑 끝에 딛고 선 절망의 공허감에 시방 잇빨을 갈고 내닫는 차 쇠바퀴에 반드시 두개골을 부딛고 말리라.
청마는 죽기 십여 년 전에 이런 심상치 않은 글을 남겼다. 마치 시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글이다. 시인의 직관은 날카로워서 때로는 다가올 미래를 꿰뚫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에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부산의 좌천동 앞길에서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다가 한 시내버스에 치였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버스에 치인 청마는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유독 천년고도 경주를 사랑해서 주말이면 술집들이 늘어서 있던 ‘쪽샘’을 거쳐 반월성이나 남산 기슭을 자주 거닐다가 돌아가던 청마는 그렇게 떠나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초간 삼간 짓고 할망구와 단둘이 살다가 뼈를 묻겠다”던 시인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청마는 부산시 서구 하단동의 산록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