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점보의 전설>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청미천이 흐르고 있는데 백족산 동남쪽아래 청미천을 막아
만들어진 보를 자점보(自點洑)라고 하는데 조선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누리다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金自點)이 쌓았다고 한다.
백족산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명당의 묘자리가 있는데 김자점이 눈독을 들이다가
권세를 잡자 자기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앞에 큰물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지라 보를
막아 물이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게 하여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영의정에 올랐으나 욕심이 더하여 역모를 꿰하여 왕이 되려하였으나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지라 김자점의 아버지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를 하게 되었는데 묘를 파내어 관을 열고 보니
용으로 변하여 있었다고 한다.
김자점은 어렸을 때부터 청개구리처럼 아버지의 말을 한번도 옳게 행하지 않고
반대로 하여 늘 걱정이 많았는데, 김자점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언을 하기를
내가 죽거든 백족산 금반형 묘자리에 묻되 물이 없음으로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시신은 꼭 바로 뉘어 묻으라고 하였다.
김자점은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반대로만 행한 게 죄스러움을 느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로 하여 시신을 바로 묻었는데 부관참시를 하려고
관을 열어보니 용으로 환생하였으나 바로 뉘여 묻었기 때문에 뒤집으려고
바둥바둥하는 것을 칼로 쳐서 죽였다고 한다.
반대로 엎어서 묻었다면 바로 자범보의 깊은 물로 들어가 승천하였다면
김자점은 반역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족산(白足山)은 장호원읍 남서쪽에 우뚝 솟은 해발 402m의 산으로 백개의 발이 달린 커다란 지네가 이 산에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백족산'으로 불리 워 지기도 한다.
백족산의 서북면은 경사가 완만한 반면, 남동면은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어 산줄기가 맺힌 그 밑을 청미천이 감돌아 흐르고 있으니 조선 영조 때 문신인 유척기(兪拓其)가 지은 다음 싯구를 생각나게 한다.
山欲渡江江頭立 산은 강을 건너고저 강머리에 우뚝 섰고
水將 石石頭流 물은 장차 돌을 뚫고서 돌머리로 흐르더라.
이 백족산 기슭에 청미천을 막아 쌓은 보(洑)가 있으니, 인조(仁祖) 때의 역신 김자점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 또는 '자재미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백족산 산중에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고 하여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김자점이 이 명당자리에 잔뜩 눈독을 드리고 있다가, 인조반정(仁組反政)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권세를 휘어잡게 되자 부친의 묘를 이곳에 썼다. 그러나, 풍수설에 이르기를 비룡(飛龍)은 물이 있어야 마음껏 조화를 부릴 수 있으니, 비룡상천형에는 반드시 그 앞에 큰물이 있어야 하는데 청미천 만으로는 물의 세력이 부족한 것이 한가지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임부들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가로질러 석축을 쌓아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는 인공호수를 만듦으로써,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비룡상천의 명혈(名穴)이 되도록 하였다. 그 후 가뭄이 들면, 인근지역의 농부들이 자점보의 물을 몰래 뽑아 썼던 탓에 지금의 장호원읍 오남리(梧南里) 일대는 가뭄을 모르는 옥토가 되었고, 김자점이 이곳에서 나는 쌀을 가져다 먹었기 때문에 득세하게 된 것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풍수설을 크게 신봉했으니, 비룡상천의 명당을 차지하게 된 김자점이 더욱 기고만장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공신으로 득세하고 그의 손자를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부원군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작인 영의정에까지 올라 마음껏 권세를 휘두르게 된 것도 부친의 묘자리를 쓴 덕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을 모함하여 죽이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마침내 효종(孝宗) 2년(1651) 청나라와 내통하여 역모를 꾀한 사실이 드러나서 사형에 처해지니, 항간에는 '이괄(李适)이 꽹과리가 되고 자점이 점점이 되었다'는 두역신을 조롱하는 동요가 생겨났다.
김자점이 역모죄로 죽은 후 백족산에 있는 그 부친의 묘를 파헤쳤더니 장례를 지낼 때 엎어서 묻었던 시체가 거의 용의 모습으로 화하여 자점보 쪽을 향해 굴을 뚫고 전진해 가던 중이었더라고 한다. 결국 형리들이 용의 목을 잘랐는데 지금도 백족산 기슭에 있는 이 비룡상천의 명당자리에는 그 때 용이 뚫은 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바람이 몹시 부는 날도 이곳만은 바람기가 조금도 없이 잔잔하다고 한다.
자점보는 지금도 그 형태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어, 오남리 벌판에 물을 대는 중요한 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장호원 읍지에서 -
지금의 자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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