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
고고학적 발굴과 중국 사료로 추적한 고조선의 비밀 |
단군을 거론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고 이르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한민족은 백두산을 좋아하고 숭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은 태백산은 틀림없이 백두산을 뜻한다고 해석해왔다. “환웅이 백두산 꼭대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라고. 합리적인 상상을 해보기로 하자. 지금도 백두산은 여름에만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다. 9월이면 벌써 눈이 내려 입산이 통제됐다가 5월이 돼야 다시 올라가볼 수가 있다. 물론 전문 산악인이라면 한겨울에도 올라갈 수 있겠지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그곳에 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도시를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필요할 때마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의 얼음을 깨고 물을 확보할 것인가. 태백산을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평양 인근에 있는 묘향산으로 환치해봐도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예루살렘처럼 낮은 산이 있는 곳이 아니면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든 사례는 없다. 태백산은 눈을 이고 있는 흰 산일 수도 있지만 흰 바위산일 수도 있다. 흰 바위산은 도처에 있기에 태백산을 흰 바위산으로 이해한다면, 환웅과 단군을 백두산에 연결시킬 이유가 사라진다.
평양은 만주 땅 여러 곳에 있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단군을 거론하지 않고 평양을 ‘선인 왕검의 땅(仙人王儉之宅)’으로 묘사해놓았다. 대체로 단군은 임금, 왕검은 제사장으로 해석해왔으므로, 왕검은 선인(仙人)과 통한다. 그로 인해 단군이 평양에 고조선을 세웠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평양이 있는 대동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 유물은 국가 단계의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고조선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평양이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편평한 땅’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평양은 도처에 있을 수 있다. 고대에는 주민이 이주하면 그들이 살던 곳의 지명도 그대로 갖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대동강의 평양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명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가 된 집안 형을 따라 북경에 가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열하일기(熱河日記)’란 책을 남겼다. 열하는 북경 북쪽에 있는 난하(欒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를 뜻하기도 하고, 무열하가 난하를 만나는 곳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했다. 이곳은 도처에 온천이 있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열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열하는 지금 승덕(承德)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열하는 북경에서 4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청나라 황제의 별장이 있었다.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조정은 열하에서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치른다고 통보해, 박지원 일행은 급히 열하로 찾아갔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열하일기에는 만주 땅(요동지역)에 평양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평야지대인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다면, 평양은 넓은 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다.
강가에서 일어난 문명
또 한 번 합리적인 상상으로 세상을 돌아보기로 하자.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로 황하·인더스·유프라테스·나일 강을 꼽는다. 세계 4대 문명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전부 강가의 평지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부산 동삼동의 조개무지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터도 강가나 강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됐다. 서울에서도 움집을 비롯해 신석기인의 문명 터가 발견되는 곳은 북한산 꼭대기가 아니라 한강 부근인 석촌동 일대이다.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을 누리던 곳에서 나온 것이지,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청동기를 가진 세력이 이동하더라도 이들이 찾아가는 곳은 대개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청동기인은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그곳에 정착하니,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이 있는 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환웅과 단군은 신석기 후기나 청동기 문명을 가진 세력의 대표였을 것이다. 이들은 근처에 흰 바위산이 있는 강가의 편평한 땅에 살던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이주해 왔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은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시기 동북아에서는 이미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발달해 있었으므로, 단군이 세운 나라는 이보다 발달한 청동기 문명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한반도 북쪽의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2300여 년에 만들어진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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