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중국 역사서 宋書의 기록
백제는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千餘里 밖에 있었다. 그후 高麗가 遼東을
침략하여 점령하니, 백제는 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다
.
2.중국 역사서 南齊書의 기록
이때 魏國의 虜又發이 騎兵 10萬으로 백제를 침공하여 그 境界에 들어갔는데,
牟大(百濟 東城王)가 장수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를 파견
하여 군대를
이끌고 虜軍을 襲擊하였다. 그리하여 虜軍을 크게 破하였다.
3.중국 역사서 梁書의 기록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려와 함께 遼東의 東쪽에 있었다. 晉國 때에 고려가 遼東을
점령하여 갖자 백제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여 百濟郡을 두었다.
4.중국 역사서 通典
처음에 百家가 바다를 건넜기에 그로 인해 百濟라고 일컬었다. 晉國 때에 고려가
遼東을 침략하여 갖자, 百濟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였다.
5.중국 역사서 資治通鑑
孝宗 永和 2年 正月 처음에 扶餘가 鹿山에 거하였는데, 百濟에게 侵掠당하여 部落이
쇠퇴하여 흩어져서 서쪽 燕나라 근처로 移徙하였다.
6.중국 역사서 魏書 列傳 百濟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리 떨어져 있으며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 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寄居한다.
[해설]魏書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붙어 있지
않았으며, 그것도 1천리나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치를 小海의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小海는 渤海를 말한다. 즉 大陸百濟는 遼西
지역으로서 고구려 국경과 1천리 이상 떨어진 渤海 남쪽 一帶에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7.중국 역사서 舊唐書
百濟國은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東北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倭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高麗에 이른다.
8.삼국사기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强兵 百萬으로써 南으로는 吳越을 侵害하고 北으로는
燕,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9. 중국 역사서 南史 列傳 夷貊 東夷 百濟
都城이 있는 곳을 일컬어 固麻라고 한다. 邑을 일러 擔魯[Damuro]라고 한다.
중국의 말로 郡縣과 같다. 그 國土에는 22擔魯[Damuro]가 있다.
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分割하여 雄據한다.
10.일본서기 神代 上 第4段 "大八洲生成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淡路[Damuro]洲를 胞로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로 淡路[Awaji]洲라 하였다
[해설]일본이 淡露(Damuro 즉 백제의 지방관제인 Damuro)를 胞로하여
生成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Awaji로 訓讀한 것이다.
11.梁書 列傳 諸夷 東夷 新羅
[원문]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
[번역문]그 나라(新羅)는 百濟 東南 五千餘里에 있다. 그 땅의 동쪽은 大海와
가까우며, 南과 北은 句麗, 百濟와 接하고 있다.
[해설]백제의 東南쪽 5千餘里에 新羅가 있으니, 이것은 바로 백제가 遼西地域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되고,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서쪽 경계에 신라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史實이니, 신라의 남쪽이 백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은
당시에 이미 加羅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12.北史 列傳 新羅
[원문]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初附庸于百濟,
[번역문]그 왕은 본래 百濟人이다. 바다로부터 도망하여 新羅로 들어가서
점차 그 나라에 王이 되었다. 처음에는 百濟에 附庸했다.
13.일본서기 : 古代 일본천황이 百濟人임을 증명
1)천황의 거처: 百濟宮 舒明天皇 12,13년
2)國刹: 百濟大寺 舒明 11년 皇極天皇 元年
3)棺安置所: 舒明천황의 棺安置所를 百濟大殯이라 함 舒明 13년
4)일본 지배계층이 사는 마을
百濟大井 敏達天皇 元年
石川 百濟村 敏達 12년
下百濟 河川村 敏達 12년
5)河川: 百濟川, 지금의 曾我江이다.
6)船: 百濟船 白雉 元年
7)客館: 百濟客館 皇極천황 2년
8)音樂: 百濟樂 天武 12년
일본천황이나 지배계층과 관련된 지역,事物名이 온통
백제로 되어있다. 일본천황이나 지배계층이 백제인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천황의 屍體 安置所를 百濟大殯이라 한 것은
일본천황이 백제인임을 明明白白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않기
때문이다.
14.백제 武寧王의 誌石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 62歲되던
癸卯年 5월 7일에 崩御하시고
乙巳년 8월12일에 올려 모셔 大墓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해설]백제 武寧王의 誌石에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崩자가 새겨져 있다.
즉 백제 武寧王은 백제, 중국 대륙 일부, 倭 열도를 통치하는 황제이셨다.
15. 七支刀의 銘文
*앞면* 泰(和)四年{五혹은四}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 {出} 百兵 宣供供候王 0000作 - 泰和 4年 五月(혹은 4月)
十六日 丙午正陽에 百鍊鋼鐵로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候王에게 보내준다.
0000가 제작한 것이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
造傳示 {後} 世 - 先世以來로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 奇生聖音이 倭王 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後世에 길이 傳하여 보일지어다.
[해설]백제 王世子가 候王인 倭王에게 七支刀를 下賜하고 있다.
倭王이 백제의 候王이라고 4세기경의 유물 七支刀에 銘文으로 쓰여져 있다.
또 그런 글이 쓰여진 유물을 보물로 倭國이 간직하고 있다. 倭王이 바로 백제
王世子의 이 명령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傳示後世" ---> 後世에 전하여 보여라.
이것을 보면 백제 왕세자들이 식민지 倭를 통치하는 총독인 것을 알 수 있다.
16.任那日本府에 대한 중국 역사서 通典의 인식
[원문](新羅)遂强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
[번역문]新羅가 드디어 强盛해져서 그로 인해 加羅,任那諸國을
襲擊하여 그것들을 滅亡시켰다. 둘다 三韓의 땅이다.
[해설}삼국사기, 日本書紀에 보이는 加羅,任那諸國이 通典에 보인다.
그런데 通典은 전혀 加羅,任那諸國에 倭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즉 任那日本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단지 加羅,任那諸國이 外部 세력의 도움도
없이 신라의 공격을 당해 멸망했다는 기록 뿐이다.
17.東夷의 强國은 倭國이 결코 아니다
1)北史 列傳 百濟
[원문]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번역문]東明의 後孫으로 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仁과 信이
두터웠다. 처음에 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漢나라 遼東太守 公孫度가 딸을 주어 妻를 삼게 했다.
점차 "東夷의 强國"이 되었다. 처음에 百家가 바다를 건너서 그로
인해 이름을 百濟라고 했다.
2)梁書 列傳 諸夷 東夷 百濟
[원문]王餘隆始復遣使奉表,稱「累破句驪,今始與通好」.
而百濟更爲强國.
[번역문](백제)王 餘隆이 비로소 다시 使臣을 보내어
表를 올렸다. 이르기를 여러 번 高句麗를 破하고 이제야
비로소 友好를 通한다고 하였는데 백제는 다시 "强國"이
되었다.
18.梁職貢圖..百濟
[본문]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等附之
[번역문]普通二年 그 왕 餘隆(=武寧王)이 使臣을 보내 表를 올리고 이르기를 고구려를
여러 번 破했다고 했다. 治所城(=首都)을 固麻라고 하고, 邑을 일러 擔魯라고 한다.
중국에 郡縣이다. 22擔魯가 있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나누어 가졌다. 백제에 附庸하는 小國은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