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서안 여행기
(서안은 진시황이 불로장생은 못하였어도 영원하게 영혼이 살아숨쉬는 곳이다)
중국 섬서성(산시성)의 성도인 서안을 전시회를 보려고 가면서 관광도 하였다
전시회는 어느 곳 이든 하는 것인데 서안으로 간 이유는 요즘 서안이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들이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삼성전자가 반도체공장을 엄청난 규모로 투자를 한다고 발표되었고 현재 부지 위에 상하수도와 도로 등 일반적으로 필요한 준비가 되었으며
이번 달 12일에는 기공식을 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어떠한 전시회를 하는지가 궁금도하여 전시장이 두 곳이 있는데 모두를 방문하기로 하고 서안을 간다고 계획을 잡아 최소의 비용을 들여 계획을 잡고 출발하였다
이번에 다시 안 사항이지만 비행기표를 왕복 1260위안을 들었다
편도 630원이 한국 돈으로 100,000원이 조금 넘는다
그리고 민박집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서 우리말도 통하고 아침밥도 한식으로 먹으며 단돈 100원으로(한화 17,000원) 하루를 묵었고 또 인터넷이나 한국과 중국 텔레비전을 모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중국 여행을 하려면 먼저 인터넷으로 여행지의 사정을 정확하게 찾아서 알고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며 비행기표는 특히 60%까지 디스카운트해주는 날을 택하여 가는 거 오는 거를 별도로 맞추어 사는 것이 좋다
편도만 파니 일보고 오기 전에 사면 영락없이 2배의 비행기표를 사는 경우가 있으며 또 마지막에 사서 30%의 가격으로 살수도 있는 것이 중국의 비행기표 가격이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여행은 계획성 있게 다니면 비용절약을 하며 알차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번에 다녀온 것이 함양비행장에 내려서 서안시내 민박집에 들려 여장을 풀고는 바로 엘리디 전시회장을 찾았다
1~4전시장중 엘리디는 2전시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3~4전시장을 돌고나서 본관 전시장을 한바퀴 돌면서 좀 엉성하기는 하여도 좋은 전시장을 관람하였다
그리고 나오다가 자전거 및 자동차전시를 1전시장에서 하고 있어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국상회사무실을 들려 이현재 총무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교민이 1000명중 500명이 선교사라고 하여 좀 의야 하고 한국사람들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양관이 중심에 있었기에 저녁을 서안에 머무는 사람들과 만나서
대안탑이 있는곳으로서 식사를 하고 야경을 둘러보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감히 중국이 아니면 흉내도 못낼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서부지역 구매품 전시회장을 찾아 관람하였다
한국회사도 두 군데 참여하여 함께 보고는 식품부터 없는게 없는 전시회였다
전시를 보고는 삼성아이상을 들려 임하과장과 미팅을 하고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축축하기는 하였어도 고대부터 현재를 보고 좋은 관람을 하였다
박물관인지 병마용에서 찍은 사진이다
병마용 박물관
다음날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병마용과 화청지 그리고 리산(려산)을 둘러보고 비가 너무 내려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자는 심사로 돌솥마을에서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한 것이 일행들이 바이주 두병을 마시는 것을 보면서 과음하네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병마용에서 찍은 사진이다 비가 와서 실내이기는 했어도 설명도 없이 다니다 보니 아는게 없다
다음날은 화산을 김밥싸서 소풍가는 느낌으로 갔다
약 시간반을 가니 바위산이 보였다
입장료 180원과 보험료 10원 그리고 차량비왕복 40원을 타고 오르니 케이블카가 있었다
다시 여기서 150원의 왕복 케블카비를 내고 구매하여 산을 오느니 1600고지 북봉이었다
남봉과 동봉 그리고 서봉을 오르면 되는데 2160미터를 오른다는 것이 엄두가 안나서 가는곳까지 가다가 내려오자고 하는데 좌우가 하늘이요 바위의 모난곳에 계단을 콩크리트로 바위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으며 두 사람이 난간을 잡고 오르거나 내려오는 정도로 아찔하다
정말 화산은 명산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남봉이 2600미터라고 우측에 표시 되어 있다
이정표가 있다 오운봉은 남봉가는 표시다
북봉이 작게 보인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산하면서 한 컷~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어떤곳은 70도 각도로 좌우 뒤가 아찔한 절벽이다
산등성에 사람들이 인산인해요 바위집이 있다
구름옆으로 있는 남봉
내뒤에가 북봉이다
북봉정
저 산을 오르려면 사실 어려운데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아찔함을 뒤로하고 정상을 오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올라오던길이 아닌 다른길이 있어 북봉으로 가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산너머도 산정상과 하늘과 구름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산임을 실감하며 많은 인파들과 사진도 찍고 놀기도 하며 즐기었다
그중에 한국 서울여행객이 20여명이 오셔서 함께 사진을 한장 남기었는데 그 사진 돌려받을 수는 없을듯하다
그일행중 몸이 불편하신 분이 계셨고 또 중국인중에 한사람도 자식들이 모시고 온듯한데 몸이 불편함에도 1500고지의 능선에서 즐기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일행은 좋은 산행을 하고 내려오니 3시쯤 되고 서안으로 돌아오니 5시가 조금 넘었다
저녁을 중국식으로 만두와 중국요리로 먹고 나서 하루를 마감으 하면서 정리를 해본다
내일을 천진으로 가는 날이다
그리고 월요일이다 삼성반도체가 있는 곳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하여 권선기사장과 공장부지를 견학을 하였다
이제 상하수구나 전기 도로 등 기초만 되어 있었다
넓은 뜰이 얼마 안되어 건물이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겨보기로 하고 사진을 찍어 놓았다
그리고 저 뒤로 병풍처럼 걸쳐진 산을 가보자 하고 계곡을 들어섰다
입구에 태평 산림욕장이었다
우리는 들어가는 곳까지 들어가 보았다
앞으로 이곳에 관광객이 많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돌아 나오는길에 포도 한 상자를 사서 천진에 가지고 왔다
점심을 서안에 있는 사업가들과 한국 음식점에서 함께 하고 차 한잔을 한 뒤 천진 비행기를 타고 왔다
맨 마지막에 이쪽에 대한 내용은 더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비행기가 연착이 되어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였다
아래 내역은 여행과는 다른 그 지역의 역사나 관광지 그리고 일부 나의 생각을 검색하여 올리면서 참고로 올렸다 나름내로 읽어 보면 도움이 될 내용이다
중국은 넓은 대륙에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여러 나라가 생기고 없어지면서 중국대륙을 통일도하고 또 분리된 여러 국가로 형성되어 국가를 이루거나 부족을 이루면서 현재의 중국이 되어 요즘은 중국이 만리장성이 조선의 천리장성을 포함한 만리장성으로 포함하면서 중국공정을 세우고 발표하면서 고구려와 발해도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현실까지 온것이다
중국은 신강우루무치(위구르족)나 히말라야(티베트, 장족)지역의 민족이 통일을 꿈구고 있는가운데 강력 저지하고 있다
하지만 동북삼성의 조선족 자치주가 많은 곳엔 우리민족들은 중국 예찬론자들이 되어 있을 정도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제일 우려한 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 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이 정치를 잘한다는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이야기로 빠졌는데 오늘 서안이야기를 바로 해야겠다
섬서성(陝西省)은 한국사람들이 협서성(峽西省)이라는 표현의 오류를 범하는 명칭이다
협자와 섬자는 엄연히 다르다
섬서성은 서주(西周) 시대에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산현[陕县]인 산위안[陕原]의 서쪽에 있다 하여 '산시[陕西]'라고 이름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진(秦) 나라의 영토였으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내사(内史)와 상군(上郡), 한중군(汉中郡)이었다. 한(汉) 나라 때는 사예(司隶)와 병주(并州), 익주(益州)에 속하였고, 송(宋) 나라 초기에는 섬서로(陕西路)를 두었으며, 원(元) 나라에 이르러 섬서행성(陕西行省)이 설치되었다.
면적은 19만여㎢로 국토 총면적의 2%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시안·셴양[咸阳]·바오지[宝鸡]·한중[汉中]·웨이난[渭南]·옌안[延安]·퉁촨[铜川]·안캉[安康]·위린[榆林]·상뤄[商洛] 등 10개 지급시(地級市)와 3개 현급시(县級市), 80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칭하여 '산[陕]' 또는 '친[秦]'이라고도 부르며, 성도(省都)는 서안 중국어로 시안[西安]이다. 황허강[黄河] 중류 지역에 있으며, 서북 지역의 각 성들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다.
중원(中原)에 있는 성으로 중화민족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며, 일찍이 직립보행을 한 '란톈원인[蓝田原人]'과 초기 호모사피엔스인 '다리런[大荔人]'이 활동하였다. 시안의 반포[半坡]에서는 6000년 전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시기에 활동한 고대인의 촌락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관중[关中]은 BC 11세기 이래로 주(周)·진·한·당(唐) 등의 13개 왕조가 도읍을 세운 곳으로, 광대한 중국에서도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인구밀도가 1㎢당 900명인 적도 있다.
유구한 역사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한나라의 역사가로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马迁)이 한청[韩城] 출신이고, 정치가 장건(张骞)은 청구[城固] 출신이며, 당나라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웨이난[渭南] 출신, 두목(杜牧)은 창안[长安] 출신, 의학자 손사막(孙思邈)와 서예가 유공권(柳公权)은 모두 야오저우[耀州] 출신이다.
주민 구성은 한족(汉族)·후이족[回族]·만주족(满州族)·몽골족[蒙古族] 등 4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수민족의 비율은 0.5%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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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 시대에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산현[陕县]인 산위안[陕原]의 서쪽에 있다 하여 '산시[陕西]'라고 이름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진(秦) 나라의 영토였으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내사(内史)와 상군(上郡), 한중군(汉中郡)이었다. 한(汉) 나라 때는 사예(司隶)와 병주(并州), 익주(益州)에 속하였고, 송(宋) 나라 초기에는 섬서로(陕西路)를 두었으며, 원(元) 나라에 이르러 섬서행성(陕西行省)이 설치되었다.
섬서성은 중국 대륙의 중요한 요충지며 주위에는 산서와 하남 호북 중경 사천 감숙 우하회족자치주와 내몽고자치주8개의 성이나 시로 둘러싾여 있는곳이다
동서를 막고 남북으로 가로지른 타이항산맥에는 갑골문자 발상지도 있으며 동서로 가려면 험한산을 넘고 또 넘어야한다
또 남북으로 가리어 동서로 이어진 치링(친령)산맥이 걸치고 있어 사천으로 가려면 험한 산을 몇겹을 넘어야 한다
서쪽으로 가는길은 실크로드로서 사막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황허강 중간지점이라는 점이요 넓은 평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은 실로 중국의 요충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도를 수없이 한곳이다
이러한곳에 서안이라는곳은 섬서의 성도요 중심지의 도시이다
인구 8,252,000명 (2000) 이요 면적은 9,983.0㎢이다
웨이허 강[渭河]의 황투[黃土] 고원에 있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수도였고 매매와 교역의 중심지이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BC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성(長安城)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로 BC 202년 지금의 시안 바로 북서쪽에 세워졌다. 왕망(王莽)의 난(9~23)에 뒤이은 혼란의 와중에 장안 성이 크게 파괴되었으므로 23년에 세워진 후한(後漢)은 뤄양[洛陽]을 수도로 정했다. 서북 변방의 이민족들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6세기에 서위(西魏)와 북주(北周)가 단기간이나마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은 수세기에 걸쳐 쇠퇴했다. 그러다가 수(隋 : 581~618)가 장안을 수도로 정하자 이곳은 다시 번성했다. 수에 이어 당(唐 : 618~907)의 수도가 된 장안은 크게 팽창하여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즉 궁성(宮城), 관리들이 거처하면서 집무했던 황성(皇城), 장인(匠人)과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던 외곽성이 바로 그것으로,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이 몰락한 후 장안은 상업 중심지이며 중앙 아시아와의 무역중개지로서 그 기능을 계속 유지했으나 점차 쇠락했다. 13세기에 중국에 왔던 마르코 폴로는 이 도시를 번창하는 교역 중심지라고 묘사했다. 현재 널리 통용되는 이름인 시안은 명대(明代 : 1368~1644) 이후에 정해졌다.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1943년에 다시 시안으로 복귀되었다. 1920년대부터 이 도시는 소련으로부터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주요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1936년 12월의 시안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이 사건으로 항일국공합작(抗日國共合作)이 시작되어, 동남 아시아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제국주의가 최후를 맞게 됨을 예고해주었다.
근대산업으로 제철소·방직공장·전기기계공장 및 비료와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이 있으며. 중국 주요농업지대의 중심지로 목화·밀·차 등 농산물 가공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시안과 동해안의 쑤저우[蘇州]를 잇는 룽하이[隴海] 철도가 놓여 있으며 그밖에 몇 개의 철로가 서쪽을 향해 뻗어 있다. 시안에 있는 산시 성립박물관은 예전에는 공자(孔子) 사당이었다 나는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많은 생각이 크로즈업 되었다 중국의 고대부터 이어져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불상 등 중요한 유물들을 모아둔 베이린[碑林]으로 유명하다. 주변에는 당대에 세워진 샤오옌 탑[小雁塔], 다옌 탑[大雁塔 : 높이 45m], 다츠언 사[大慈恩寺], 명대에 건립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원래는 742년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14세기에 지어진 거대한 이슬람교 사원, 보존상태가 양호한 14세기의 성문 3개 등 흥미 있는 유적들이 많은데 밤에 보는 야경은 더 아름다워 우리 전통음식점인 한양관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보는데 눈이 부시었다. 시안 북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진시황릉(秦始皇陵)이 있다. 이 능은 1974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전투대형으로 정렬되어 있는, 진흙으로 빚은 실물 크기의 전사(戰士) 토우(土偶)가 6,000여 점이나 발견되었다는데 하루의 별도의 시간을 내어 병마용과 화청지를 들어 보았다
비가 많이와서 화청지와 려산(리산)은 문앞까지만 아쉽지만 가서 보고만 왔다
화청지는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고 진시황이 목욕했다는곳으로 유명하다고한다
리산은 중국의 오대악산중의하나로 화산과 함께 유명한 산이라고 하는데 오르지 못하였다
어찌되었던 병마용은 비가 왔지만 꼭 보고 와야겠다는 마음으로 관람을 하였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린퉁 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갱은 진 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테라코타이다. 병사, 말 등을 흙을 사용하여 등신대로 제작하여 구워 만들었다. 진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사망하였으므로 그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병마용갱은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릉이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기록은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1 세기가 지난 때에 저술된 것이다. 그는 진시황릉이 지하에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였으며 수은이 흐르는 100여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에 온갖 보물과 병사를 조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지하 궁전으로 지어졌으며 완공이 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최근 조사 결과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의 토양이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이라 추정되고 있다.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인 것이다. 리산에 대한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원격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 시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병마용갱은 1974년 1호 갱이 발굴된 이후 현재까지 발굴이 진행 중이다.
1호 갱: 1974년에 발굴되었다.총 14260제곱미터이며, 진용 약 6000구에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2호 갱: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있다.
3호 갱: 1976년에 발굴되었으며,완전 발굴된 520제곱미터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진용 78건, 전차 1대가 출토되었다.
4호 갱: 다른 갱도와 달리 병마용이 없이 비어있는 갱도였다.
5호 갱: 발굴 되었다.
6호 갱: 2000년에 발굴되었으며, 400 제곱미터이다.
7호 갱: 2000년에 발굴되었으며, 700 제곱미터이다.
또 다른 병마용갱은 2002년 12월 7일 중국 산둥 성 장치우에서 전한시대의 높이 30cm 규모의 병마용을 발굴하였다.
이는 병마용이 진나라에서 한나라 시기 지배계급의 장례 풍습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진 시황은 누구인가 알아보자
진 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의 아들이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영정은 왕위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영정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 왕관등의 요청에 따라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통일 후, 진시황은 뒤의 신하나 자식들이 아버지나 선군의 시호를 짓는것이 품위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자신의 후대 황제들을 이세,삼세황제등으로 부르게 지시하였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 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30kg)으로 정해졌다.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기원전 213년,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 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분서갱유는 원래 단지 책을 압수하거나 학자들을 단속하는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제국 성립후 유학자들이 한제국의 성립의 명분성을 위해서 확대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어느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신기루 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느날 제(산둥성)에 살고 있는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본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 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어졌다.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한국의 제주도를 거쳐 탄 배가 지금의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각지에서 수상쩍은 방사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디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자기가 불로 불사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돈을 뜯어가자 시황제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시황제는 불로 불사 약인 줄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은이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 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줄어든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가족관계는
· 부왕 : 진 장양왕(秦莊襄王)
· 모후 : 조희(趙姬)
· 동생 : 장안군 성교
· 후비 : 호희(胡姬)
· 후비 : 정비(鄭妃)
· 후비 : 옥수비(玉修妃)
· 자녀
o장남 : 부소
o18남 : 진 이세황제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다. (이후 건업으로 개칭되고 이후 건강으로 재개칭)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또는 화가 난 시황제가 그 지역의 주민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원래 이세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족시켰다
현재 서안의 빛내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자
차기 당서기로 지목되고 있는 시진핑은 섬서성 서안 사람이다
시진핑은 산시성 출신으로, 공산당 입당에 10번 실패한 태자당 계열이다. 확고한 개혁개방론자였던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전쟁 영웅 펑더화이의 측근으로 국무원 부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1962년 펑더화이 실각으로 산시 성으로 좌천당한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기, 숙청된 아버지를 따라 농촌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1975년 시중쉰은 복권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그 후 시진핑은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중국농촌의 시장화를 위한 법제 건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부 졸업 후, 국무원 껑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허베이 성정딩 현당위원회 서기, 푸젠 성 샤먼 시 부시장, 푸저우 시 당위원회 서기 등 푸젠 성에서의 공직 생활을 거쳐, 2000년에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특히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재직시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8년 국가 부주석이 됐다.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공산당 중앙 서기처 서기, 중국 국가부주석, 중앙 당교 교장이다.
부인은 중국의 국민가수로 통하는 펑리위안(彭麗媛)이다. 개국공신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보수와 진보의 지지를 모두 받는 시진핑은 2013년 차기 주석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2010년 10월 18일 제 17기 5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 지위를 손에 넣은 것으로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로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관료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방적인 자세를 지닌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 간부의 연설이나 문장을 "말이 많고 공허하며 진실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문장이나 연설이 더 잘 식별될 수 있고, 국민의 이해 역시 도울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일반 대중은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기도하다. 거짓으로 대하면 대중들은 납득하려들지 않는다"며 자신이 지니는 개혁적 성향을 나타냈다.
2009년 7월 5일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 시에서 발생한 우루무치 소요 사태의 해결을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혈 사태는 위구르인 주민과 한족과 무장 경찰이 충돌한 사태이다. 2009년 7월 19일 현재 중국 당국에서는 사망자 197명, 부상자 1,721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망명 위구르인 조직인 세계위구르 회의는 중국 당국과 한족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위구르인이 최대 3,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4]
시진핑의 항미원조 전쟁에 대한 중국정부 입장을 두둔한 듯한 발언으로 대한민국이 문제를 제시했으며 이에 한국전쟁에 대해서 북한의 남침으로 인정하였다.[5]
1987년 대중적 인기 가수인 펑리위안(彭丽媛)과 결혼을 하여 1992년 외동딸인 시밍쩌(习明泽)를 낳았다.
2005년 7월 18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전라남도 초청으로 저장성 당서기의 자격으로 방한하여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 섬서성 서안에는 삼성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산시성 당국과 현지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권오현삼성전자 부품(DS)부문 부회장은 중국 산시성 시안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기자와 만나 "(삼성전자와 산시성 간) MOU 체결을 위해 중국에 간다"고 밝히고. 권 부회장은 중국삼성 장원기사장 등 주요 임직원이 참석하여 계약이 체결되어 현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MOU 체결식에는 중국 측에서 자오정융 산시성장을 비롯한 현지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MOU는 삼성전자가 이사회를 통해 중국 현지 반도체공장 부지로 시안 고신기술산업 개발구를 선정하였다. 이곳에 들어설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에 삼성전자는 자본금 23억달러(약 2조5000억원)를 출자키로 했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산시성과의 MOU 체결을 계기로 중국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에 가속도를 붙이게 됐으며. 당초 일정대로라면 삼성전자는 연내 산시성 시안에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에 들어간 뒤, 오는 2013년 말부터 10나노미터(㎚)급 낸드플래시를 본격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삼성이 중국 내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부지로 산시성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산시성이 중국 중앙정부가 역점사업으로 추진 중인 서부 내륙 대개발의 중심지역이란 점이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부지 선정에 한몫했다고 하며. 산시성은 서부 내륙에 있지만 반도체공장 입지로서 필수적인 용수와 물류, 부지 등의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전언으로 고속철도는 물론 항공기나 고속도로가 이미 잘 갖추어져 있기에 물류로 인한 문제점이 없다는점과 서부로 진출하고 또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좋은 요충지라는점도 한못했을거라는 나의 생각이다.
일각에선 산시성이 중국 차기 최고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고향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상기내용이 갖추어져 있다는점에서 더 큰 작용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중국 최고지도자로 등극할 경우 산시성이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지방정부에 재임할 때부터 삼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라고 한다. 실제 시진핑 국가부주석은 한때 삼성전자 쑤저우공장이 있는 저장성에서 성장과 서기를 역임했다고 한다.
한편 권 부회장은 이날 중국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라인 부지선정 배경과 관련, "추측을 자제해달라"면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는 후문도 있다.
나는 이곳을 꼭 들려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천진에서 이미 그쪽에서 사업을 추진하는 권선기사장과 김성일사장을 만나서 한바퀴 돌면서 그 규모가 엄청나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협력사 부지까지 한다면 대단한 면적의 부지임에 틀림이 없다
가까운곳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들이 보여서 저 산들에 대해서 물었더니 치링산맥이라고 한다 나는 또 궁금증이 발동하여 저녁 비행기인 것을 감안하여 산으로 차를 돌려 계곡입구로 들어서니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차에서 내려서 계곡물로 가서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손으로 떠 보았다
시원하기가 그지없었다 여기 입구다 깊숙히 들어가고픔 충동이 생기었다
다시 의구심이 발동하여 계곡으로 더 들어가 보자고 하여 한 15 키로를 들어가니 매표소가 있었다
안내소에 물어보니 태평욕 산림욕장이었다
산높이는 약 2200고지인듯한데 1500까지는 케블카가 있었다
산행시간은 5 시간 정도 케이블카를 이용하였을 때라고 한다
옆에 미 개발된 3060고지의 산이 지도에 있었다
아마 휴일에 많은 사람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계곡이요 관광지가 될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업무3일 관광2일의 서안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많은 만리장성이나 병마용 등 유산을 남기며 불노장생을 원하여 불노초를 구하라고 여러 사람을 통하여 시행도 하고 또 서복이라는 신하가 불노초를 구하러 떠나서 일본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설이 있는데 제주도 여행을 하다보면 제주도 남단에 있는 장방폭포 주변에서 이야기를 접하는곳이 있다
여하튼 불로장생은 하지 않았어도 진시황은 죽었으나 영원하게 영혼이 살아서 영혼불멸의 세계사에 남아 살아 숨쉬고 있음이다
그렇다 "진시황은 현재도 아니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슴이다"
참고로 서안의 관광지는
국가급풍경명승구로 화산(华山) 풍경명승구(1차), 린퉁리산-진병마용(临潼骊山秦兵马俑, 임동려산진병마용) 풍경명승구(1차), 바오지톈타이산(宝鸡天台山, 보계천태산) 풍경명승구(3차), 황제릉(黄帝陵) 풍경명승구(4차), 허양차촨(合阳洽川, 합양흡천) 풍경명승구(5차)의 5개소가 있으며 2007.5 66개 국가5A급 여유경구로 시안시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马俑博物馆), 화칭츠경구(华清池景区), 옌안시 황제릉경구(黄帝陵景区)가 선정되었고 2011년 1월 시안의 대안탑-대당부용원경구(大雁塔-大唐芙蓉园景区)와 웨이난(渭南, 위남)의 화산경구(华山景区)가 제2차 19개 국가5A급 여유경구로 추가되었다. 또한 UNESCO 세계지질공원으로 친령종남산세계지질공원(秦岭终南山世界地质公园, 5차)이 있다.
세계인이 눈을 돌리고 찾아오는 관광지가 되었다
나와 함께일하는 장성선 경리와 함께
삼성 반도체가 들어올 곳이다 광활하다
이곳은 화산에 있는 ~~~~신을 모시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