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성지는 어떤곳이며 어디에 있는가
용인시가 더 가까운곳이지만 안성시에 있다
용인 남사면에 코스모스길이 있다고 하여 출발하였는데 허탕을치고 감곳이 미리내성지다
작은딸과 권아인 외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소재하고 있다. 본래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1846년의 병오박해때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곳이 순교 사적지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이장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뒤편의 와서(瓦署,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되었고, 그 무렵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슬라의 시신도 인근에 안장하였고,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가 석조 성당을 건립하였고, 1921년에 사망한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슬라와 이민식의 묘가 현재의 자리에 이장되고, 그 해부터 매년 9월 26일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970년대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 수원교구의 지원으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고, 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 건립,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16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 정행만 신부가 수도회를 설립한 후, 이곳은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더욱 갖추게 되었다. 1982년 가을 사적지 안에 있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을 건립하였다.
순교자의 김대건신부의 인연으로 미리내는 천주교의 성지의가 되었고 이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 성물보급소가 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통의신비 1부터 5까지인가 돌비석이 있으며 성당과 또 예수가 마굿간에세 태어나는 모습이나 환희의신비 7까지인가 있으며 타원의 광장이 잔듸밭으로 되어 있었다
주변은 성지로 잘가꾸어져 있어 신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성지내를 한바뀌 돌고나면 마음이 가라앉고 풋풋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돌아갈것이다
규모는 79위 시복기념경당,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 미리내 본당
환희의 신비 5단
미나리 아재비꽃이 만발하였다 물봉선화도 많았다
고통의 신비 ?단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는 모습이다
외손녀다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
고통의 신비 1단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성당이다
성모마리아 상
김대건신부 석상
서산에 해가지는 성당의 정경이다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