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의 영토는 한반도의 10 배
중국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 고향은 옛 백제 땅이었습니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1902~1999) 박사가 문교부장관 재직시에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임어당(林語堂, 1895~1976) 선생을 만나 여담으로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까지 문제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임어당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東夷族)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시나요?"
이렇게 핀잔을 하는 바람에 무척 당황해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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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대 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 산동성지역에 있었다"
진짜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닌 핑딩산(平頂山·1429m)이며
우리 선조가 잃어버린 북방영토의 넓이가 69만㎢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은 큰 거친들 가운데 산이 있고
정상에 위치한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길이가 1000리로 앞쪽이 무너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나라 한림원에서 발간한 만주원류고 지리지 장백산편에는
거친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있고
인공위성 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 핑딩산은 만주벌판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산 앞쪽 부분에 무너진 흔적이 있는데다 정산에는 둘레 80리 정도의 커다란 못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백두산은 들녁 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지역을 찾을 수 없다. 천지 둘레가 20리에도 못 미쳐
보고서는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가 반도사관을 위해 우리 고대사를 조작했고 대륙의 조선을 한반도로 옮겨 놨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보고서는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 20만권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됐고 대동여지도 역시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장을 찍어 공개된 점으로 미뤄볼 때 각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팀장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다고 규정, 북방영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헌법 제 3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임시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라고 규정했고 1944년 임시헌장 2조에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라고 정했다. 그러나 1948년 제헌의회에서 국제적 마찰을 우려해 부결됐다.
삼국시대의 요하는 산서성 요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황하나 그 지류를 말함이다.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하여 삼한을 세운다. 유와 연은 고구려, 제와 노는 백제, 오와 월은 신라와 가야와 왜로 발전한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딸로 고주몽의 부인이 되는 소서노는 어하라의 여왕이 된다.
<정본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와 동빈대해(東濱大海)로나와 있다.
가지마 노모루는 출판시 이를 반대로 했다.
이는 백제를 한반도로 집어 넣기 위한 조작이었던 것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가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나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하남(河南)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이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조하는 북경과 천진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백하와 합쳐져 조백신하로 불리우는 강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현 북경 지역에는 고구려 유리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근처 어딘가가 분명 초기 고구려의 수도일 것이다.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모두가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당군 40만은 황해바다를 건넌(있을 수 없는 일)게 아니고
황하강(중국에서는 바다로 본다)을 따라 내려온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신라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太山=泰山) 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여기서 황하와 태산이라 함은 산동성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하강과 태산으로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땅이다.
3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들
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인구로 본 백제의 주 영역은 대륙인가? 한반도인가?
또한 <삼국사기> 및 모든 중국의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76만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6만호면 대충 인구 4~5백만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런 인구가 과연 한반도에 살았을까?
통계청 1992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종(1519년) 때와 현종(1660년) 조선 전체 인구가 약 76만호다.
백제 멸망 1000년이 지난 후 조선 전체의 인구가 76만호라니..
사서(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에는
신라 : 18만호
백제 : 76만호
고려 : 35만호(210만명)
조선 : 중종14년 754,146호(3,745,481명)
위에 백제가 76만호인데 한참 후 통일고려가 35만호밖에 안되나??
결론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 강역이 경기, 충청, 전라도?? 신라 강역이 경상도 뿐인가??
일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각종 사기에는 일식이나 부분일식을 본 기록들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결정적 과학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박창범교수의 네가티브 방식이란 단 한번이라도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지워나감으로서 그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고구려의 최적관측지는 바이칼호 동쪽 내몽고지역,
백제는 북경지역,
신라는 양쯔강 중류,
왜는 남지나해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삼국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여기에 반박자료를 낼 학자는 전 세계에 아무도 없다.
과학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한 압록강 변 집안과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집안으로 옮겨졌을 것이고,
옮긴 후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성이 중국/일제에 의해 집안으로 비정된 것이다.
다음은 기상청에서 21년간 근무했던 정용석씨가 쓴 책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에 보면
삼국시대 기이한 기상 기록이 나온다.
백제 기루왕 32년(A.D 108)
봄.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해 신라의 기록에는 여름 5월 큰물이 져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자를 10도에 파송하여 구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극심한 가뭄인데, 신라는 홍수가 났다니
이게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 떼
<삼국사기>에 보면
황충(蝗蟲 메뚜기데) 기록이 유난히 많다.
이 황충은 우리나라 논에 있는 낭만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나오듯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 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 떼가 지난 곳에는 풀잎 하나 남지 않고
오로지 적토(赤土)만이 남는다. 즉 엄청난 자연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메뚜기 떼는 한반도에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메뚜기의 날개 특성상 황해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기록에 황충이 있다는 것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삼국의 기록을 보면
이 황충이 나타난 기록이 3국에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없다.
그 말은 삼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에는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발해만 연안에 백제가 있었다.
즉 하북성, 산동성 유역에 백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편과 <주서(周書)>권49 열전 제41 이맥상편 백제조에서
백제는 진(晉), 송(宋), 제(齊), 량(粱)때부터
강좌(江左, 산동성 강소성 등의 양자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사신을 보내 번(藩)이라 칭하며 봉직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송서(宋書)> 권97 열전57 이만(夷蠻)편 백제조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지역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남사(南史)> 권79 열전 제69 이맥 하편에서도
진(晉)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을 경략하고 백제군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진평은 고성과 진성의 2군을 말함이다.
요서의 기준인 요는 산서성 태행산맥 안에 있다.
그 서쪽이 백제의 영토이다.
<남제서(南齊書)> 에는
백제의 동성대왕이 북조의 최강자 북위의 수십만 대군에
5차례나 승리하고 동부 평야지대에 7명의 태수를 임명한 기록이 있다.
위에서 보듯이 백제는 인접국들과 수시로 영토전쟁을 하였는데
한반도에 있었다면 말이 되는가.
몇 십만 대군을 이끌고 수시로 황해바다를 건너고도
내륙으로 수 천리를 더 들어가 싸웠다는 것인가??
대륙 동부 평야지대는 전부 백제 동성대왕이 다스린 영토였다.
북위는 산 속에서 숨어 있다가 5번이나 백제를 공격하지만 전패했다.
북위병의 시체가 들에 널리고 핏물이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최치원(857 ~ ?)은 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대에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통치하였다" 라고 기록 되었다.
오 월이 한반도 남해바다에?? 유 연 제 노가 한반도 북쪽에??
즉 백제는 한반도의 충청도와 전라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중동부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 위치를 <사기>에서 찾아보면,
연은 산서성 북쪽이고, 제는 산동성 북쪽이고, 노는 산동성 남부이고,
한나라 때 유주는 하북성 북쪽이다.
오는 강소성 남부이고, 월은 절강, 복건성 등지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말갈(靺鞨)의 전쟁 기록이 많다.
그리고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기록도 있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라면 어떻게 말갈과 전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말갈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단 말인가?
나당 연합조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신라군을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약속대로 백제 땅을 차지하려던 것이었으나..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 황하 유역으로 초기 백제의 도읍지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하고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때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을 평양(요령성)에 운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양하도(兩河道)는 황하 하류의 북과 남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이는 백제의 땅이었던 양하도에서 김유신이 군량을 조달했다는 것이다.
백제 패망시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받은 벼슬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다.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백제 개로왕이 숭산까지 제방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 21대 개로왕편에 보면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식민사학계는 이 제방을 현 한강변 풍납토성이라 하며
숭산을 검단산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이 제방은 백제 개로왕이 황하변에 쌓은 것으로
숭산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이 숭산(崇山)과 초기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름만 있고 위치가 미상인 곳이다.
침현(沈峴)과 평원(平原) 등 백제패망 시 지명도 위치미상이다.
이 지명들이 만일 한반도 안에 있었으면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 지명들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 몰랐던 것이다.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과 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백마강은 원래 금강의 지류인데 부여 근처에 와서 백마강으로 둔갑한다.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해상왕국이며 400만 인구와 수십만 대군을 지휘했다는 왕도란 말이요?
부여에 백제 유적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그래서 부여에 가면 우선 해발100m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의 고란초라도 보고 오는 수밖에는 없다.
성 중에서도 변방의 조그마한 성이었을 부소산성이다.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는 부여의 유적지들.
저렇게 좁은 곳이 700년 사직의 수도라니 말이 되는가?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딱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사학계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을 아직도 고치려하지 않고
그대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는 충청도 전라도 일대였고, 신라는 경상도 일대였다고.......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는데도 소래(蘇來)포구는 소정방이 왔기 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경기도 시흥시는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일제조작 엉터리 전설이고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바위도 엉터리 조작이다.
일제의 식민사관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는 어디였나.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낸다.
여기서 한국사학계는 대야성을 합천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백제는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군사력이 약하여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다.
여기서 이상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겼다는 기록이다.
현 역사이론이라면 백제는 한반도 서편인데,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통로인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통로가 끊겨졌을까?
백제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당나라와 함께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다.
신라는 진덕왕 때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외세를 끌어들이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이성계가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하면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방의 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이세적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요동은 고구려를 의미하고
백제 정벌군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산동성을 의미한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동쪽과 한반도의 지도 지명이 없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없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한반도 출병은 어불성설이다.
백제의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황화변이다. 숭산은 하남성 소림사가 있는 지역이다. 거기까지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이야기이다.
백마하, 주류성, 해, 사수는 사성이 있는 곳,
황산은 계백장군이 패한 곳,
래는 동성대왕 시절 임류각이 있던 곳,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
서화는 기자가 살던 곳,
바로 이 산동성에 백제가 있다. 패망시 지명이 여기 다 있으나
반대로 한반도 부여 공주에는 억지로 만든 지명들뿐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인 것이다.
수나라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때문에 산속에 갇혀 있었다.
고대 중국의 수도는 주로 서안과 낙양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다. 낙양이 동부 평야지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왜 고대 중국은 동부의 넓고도 넓은 평야지대를 놔두고 서부 산악지대에 수도를 둔 것일까? 산악지대가 평야지대보다 살기 좋아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동부 평야지대에는 동이(東夷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감히 평야로 나오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고대중국인들은 산적(山賊)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동부평야지대로 나온 것은 신라와 대진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 정도로 우리 삼국은 막강했기에 중국은 감히 동부평야지대를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그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의 최강국은 북위였다. 그 북위의 수도도 역시 산악지대로 산서성 대동시와 하남성 낙양이었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5차례나 동부평야지대인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대왕에게 완패하여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불과 백제 패망 170년 전의 일이다.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한 동성대왕이 파견한 7태수들.
수나라의 수도는 하남성 낙양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섬서성 장안이었다.
왜 그들은 평야지대로 못 나오고 산속에 갇혀 있었을까?
그건 바로 강력했던 고구려 백제 때문이다.
중국은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으나 힘이 약했다.
그런데 3국속의 신라가 배신을 때린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산 위에서 본 선망의 대상인 넓은 지역을 다 바다(海)로 보았다. 海는 큰 강, 큰 호수, 큰 평야를 바다(海)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X海란 지방이 중국 내륙에 수 없이 많다,
그냥 海라는 육지지명도 있다.
고대 중국에는 해전 기록과 유명한 수군장수가 없다.
그건 중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적벽대전은 허구의 소설이지 중국에 그런 역사 기록은 없다.
적벽은 양자강 중류 지금의 장강삼협(장장샨샤)에 있고,
거기가 위.오.촉 삼국의 격전지였다.
그 동쪽의 평야지대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의자왕 16년(656년)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간한다. “(전략)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겁니다.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들어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을 들어서게 하지 말며, 그 요새(혐애)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據其險隘以禦之).”
성충은 분명 강의 상류로 나가 적과 싸우라 했는데, 현 국사이론대로라면 백마강의 상류로 가서 적과 싸우란 말이다. 소정방이 배를 타고 부여를 오려면 분명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 와야 하는데 왜 성충은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이길 수 있다 했을까? 이 한마디만 들어도 성충이 말한 강은 부여의 백마강이 아니고 중국 황하강이며 부여는 백제의 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항이 군사적 요새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적의 수군은 요새 즉 험애(險隘)인 기벌포의 언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성충은 기벌포의 언덕이 험애(險隘) 즉 요새라고 말하고 있다. 장항은 물론 우리나라 서해안 포구에 요새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적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5천 병사와 함께 계백장군을 급히 황산으로 보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황산을 논산으로 비정했다.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을 황산으로 보냈다고 했으니 백강과 사비성 중간에 황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백강(백마강) 옆에 사비성이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부여는 원래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가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다.
이후 백제는 부여풍 복신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왜까지 동원된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겨루는 국제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이 당나라 40만 대군이 역시 배타고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병자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절대로 건너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정방 대군은 한반도에 오지도 않았다.
인천과 청도를 항해하는 1만 톤급 뉴 골든 브리지(New Golden Bridge)란 동력선이 있는데 청도까지 21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대형 선박도 대륙연안의 급 해류 지역에서 ‘걸프 스트림’을 만나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항로를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급 해류 해역에서의 항해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이 1만 척의 배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 백제로 갔다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철 동력선이 아니고 목선인데, 그런 배로 중국대륙연안 해류와 황해바다 주 해류를 횡단해 왔다고 근거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중국의 배들은 6 종류로 모두 도형강선(강물용)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 후로도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 했다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 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이며 백제는 중국 대륙 산동에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