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는 만주족으로 명왕조의 용호장군(龍虎將軍)이었으나 후에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11년간 재위하였으며 전쟁중에 화포에 맞아 68세에 죽었다.(일설에는 악성 종기로 죽었다고도 함) 장지는 심양복릉(沈陽福陵: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沈陽市> 동북쪽 천주산<天柱山> 기슭)이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건주좌위(建州左衛: 명대 중엽 이후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新賓縣> 경내에 있었음)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책봉되었다. 그는 일찍이 도독첨사(都督僉事), 용호장군(龍虎將軍) 등에 책봉되었다.
1583년부터 그는 30여년간 여진족 각 부락을 통일하고 군정합일의 팔기제도(八旗制度)와 만주글을 창조하였다. 1616년 정월 임신일(壬申日)에 칸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도읍을 허투아라(赫圖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서쪽)에 정한 후,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후금(後金)'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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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부터 그는 요동(遼東)의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에 심양(沈陽)으로 천도하였다.
누르하치는 만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 중에 국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후계자를 확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8명의 화석패륵(和碩貝勒: 패륵은 청나라의 종실 및 몽고 외번<外藩>에 수여된 작위. 지위는 군왕<郡王>의 아래 패자<貝子>의 위)에게 공동으로 조정대사를 처리토록 지시하였다.
1626년 초에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영원(寧遠: 지금의 요녕성 흥성현<興城縣>)을 공격하였다. 명나라 조정의 영원성(寧遠城) 수비 대장 원숭환(袁崇煥)은 완강히 버티면서 성을 타고 기어 올라가던 만주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으며, 이로써 만주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누르하치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성 아래에 구멍을 뚫어 성벽을 허물고 입성할 준비를 시켰다. 이를 발견한 원숭환은 서양에서 도입한 화포로써 반격을 가하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여 황급히 전군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같은 해 7월 누르하치는 상처가 재발하여 청하탕천(淸河湯泉)에서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8월에는 상처가 더 심해져 배를 타고 심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일찍이 대패륵(大貝勒)과 간통한 적이 있던 왕비 나라씨(納喇氏)를 목매어 자결토록 명하였다. 8월 경술일(庚戌日)에 누르하치는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애계보(애鷄堡, 애=雲+愛: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 남쪽)에서 죽었다.
청나라가 건국된 후에 누르하치는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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